
“유아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아이가 있는데 신부님께서 로사리아 자매님 부부가 14살 때까지 책임져 준다고 약속하면 세례를 주겠다 하시네요.”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를, 게다가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할머니마저 알지 못하는데 그 아이를 책임지라니! 그것도 10년 동안이나.
나를 찾아온 자매님은 아이의 환경과 사정을 대충 전해줬다. 부모 이혼으로 할머니가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재혼했고, 아빠는 18개월 된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둔 다음 몰라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할머니 사정도 복잡했다. 아이의 할머니는 손자를 신앙 안에서 키우고 싶어 했지만 본당 신부님께서 즉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아마도 세례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부님께서 묘안을 내셨다. 우리 부부가 10년 동안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해 주면 세례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책임을 어떻게 지라는 건지, 무엇을 어찌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북했으면 그런 식의 제안을 하셨을까 싶어 남편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곧장 수락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한 남편에게 신부님의 의향을 전했더니 그는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응답은 했지만 궁금한 게 많았다. 대체 그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들이며 신부님이 세례를 주저하신 진짜 속사정은 뭘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아이와 아이를 둘러싼 환경, 저간의 사정 등 여러 가지가 궁금은 했지만 묘하게도 별일 아닌 것처럼 걱정이 되지 않았다. 모르는 아이를 10년씩이나 책임져야 한다는 말 역시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느닷없긴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께서 미리 보고 마련하신 일인가 보다, 하며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유아 세례 날, 아이와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아이는 나이에 비해 체구도 작았고 매우 부산스러웠다. 또 모든 상황이 신기한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시키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한껏 달떠 있었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저 어린아이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 싶어 몹시 안쓰러웠다. 아이는 우리 부부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아, 너의 대부님이셔.” “너의 대모님이셔.” 할머니가 우리 부부를 소개하자 아이는 금세 ‘대부님’ ‘대모님’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세례식은 사정을 아는 이들이 함께 참례해 여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양 옆에 섰다. 남편은 대부가 되고 나는 대모가 된 것이다. 신부님께서 남편 홀로 대부 자리에 세우지 않은 까닭은, 우리를 그 아이와 두 배로 더 단단하게 묶어두려는 방편이었으리라.
그렇게 아이는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할머니가 아이 세례명을 부탁했을 때 번뜩 떠오른 이름이 ‘안드레아’였다. 비록 지금은 궁벽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1주일 뒤, 성당에서 ○○이를 다시 만났다. 할머니가 ‘저기 대부님(대모님)이 오신다’라고 하니 아이는 ‘대부님(대모님)’ 하며 냅다 뛰어와 우리 손을 잡고 조잘조잘 끝없이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저 우리를 만나는 게 특별한 일이라고 여겨 마냥 즐겁기만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가 주일 미사에 갈 때마다 거의 ○○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까?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당에 갔는데 멀리서 우리를 본 아이가 느닷없이 “엄마” “아빠” 하고 부르며 뛰어오는 게 아닌가! 엄마 아빠라니! 그동안은 내내 ‘대부님’, ‘대모님’ 하며 졸래졸래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한번 불러보고 싶은가 보다,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슴이 아렸다. 아니다. ‘에리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 저 아이가 얼마나 엄마 아빠가 그리웠으면 이럴까. 얼마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었던 걸까.
나중에 들은 얘기다. 어느 날 할머니가 아이를 이웃집에 맡겨두고 시장에 갔는데 그 집 엄마에게 슬며시 다가가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요?”라고 하더란다. ○○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엄마가 온통 자기 엄마로 보였던 걸까?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엄마, 한 번만이라도 불러보고 싶은 엄마, 엄마, 엄마라는 이름?.
아이의 엄마는 이혼하고도 종종 아이를 데려다가 한참씩 있다 보내주곤 했었는데 재혼을 결심한 후, 아이와의 인연을 과감히 끊어냈다. 네 살이었던 아이는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나고 와서, 1주일 동안이나 죽도록 앓았다.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걸까. 이후 아이는 ‘엄마’라는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못 했을 뿐이지 사실은, 그토록 엄마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부부를 만나 따뜻한 사랑을 받으니 엄마 아빠라고 불러도 되겠지라고 판단했던가 보다. 그렇게 아이는 한순간에 우리를 부모로 삼아버렸다!
신부님께는 우리 부부가 뭘 책임져야 하는 건지 끝내 여쭙지 않았다. 그저 만나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때때로 선물도 해주며, 철마다 옷을 사주는 정도로 면피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이는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고 허약했으며 갈수록 무기력했다. 학교 공개 수업이나 체육대회 때 가서 보면 멀리서 봐도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두 어깨가 항상 처져 있었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가 많았다. 달려야 하는 순간에도 아이는 전력 질주는커녕 마지못해 뛰고 있는 게 여실했다. 조를 짜 연극을 할 때도 아이의 얼굴은 펴지질 않았고, 큰소리로 대사를 쳐야 하는데도 알아들을 수조차 없이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늘 재잘거리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삶에 대한 의욕 역시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사랑을 잃은 아이는 그렇게 의기가 꺾이고 생기를 잃어갔다. 엄마를 보게 해달라며 아무리 할머니를 졸라도 엄마는 목소리마저 들을 수 없었고, 아빠는 통화조차 되지 않았다. 속상했다. 아이의 무기력에 내가 무너졌다. 내가 얼마나 슬프고 속상한지 붙들고 얘기해도 ○○이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제발 ○○이가 그 참담한 환경을 극복하여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이가 지금은 비록 진흙탕에 둥둥 떠 있지만, 끝내는 저 아래 있는 궁창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당당한 연꽃으로 피어나길 희망했다.
그즈음이었다. 하루는 ○○이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손자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했다. 툭하면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데 도대체 말을 듣지 않고, 자신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 키우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시설에 맡기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번쩍 났다. ○○이가 이렇게 된 게 마치 우리 책임인 것 같았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아이가 그렇게 된 것만 같은 죄책감에 마음이 신산했다. 신부님께서 ‘○○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책임져주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신부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으로 알아듣고 기꺼이 응답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의 엄마다. 그런데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나는 뭘 했단 말인가. 내가 낳은 아이라면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었겠는가.
난 당시 토요일마다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소년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멀리 있는 아이들도 교화시켜보겠다며 열성을 다하면서 바로 옆에 있는 아이가 이렇게 되도록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안 돼요. 이제부터는 제가 책임질 테니까 우리 수업 시간에 맞춰 아이를 보내주세요.” 책도 읽히고 글쓰기도 시키면서 내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아이가 잘 다듬어지지 않을까 싶었다.(나는 집에서 글쓰기와 독서지도를 한다.)
다른 아이들은 1주일에 두 번씩 수업했지만 ○○이는 일주일에 세 번씩 오게 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아이의 문제 행동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규칙에 둔감했고 책 읽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 같았다. 다만 나를 대놓고 거역하지 못할 뿐이었다. 지각을 밥 먹듯 했고 책을 읽지 않고 오는 날이 빈번했으며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혼을 내거나 달래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한집에서 살지 않다 보니 생활지도가 매우 힘들었다. 나의 지도방법이 집에 돌아가면 곧장 무산돼버리는데 어떻게 바로잡아지겠는가. 공부를 잘하진 못해도 나는 ○○이가 무질서한 사람이 되도록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엄한 엄마로 살았다.
달래고 어르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어느 날, 나는 ○○이에게 경고했다. “나는 네 엄마야. 너를 잘 키울 책임이 있어. 그래서 네가 변하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바르게 키울 거야.” 분명히 경고했는데도 ○○이는 그날도 책을 다 읽지 않았고, 거짓말을 했다. “손바닥 펴!” 짝~ 짝~ 짝~ 플라스틱 자로 아이의 손바닥을 때리는데 다섯 대쯤 때리자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참에 ‘엄마는 한다면 하는 독한 사람’인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 말 안 들으면 앞으로도 때릴 거야.” 짝~ 짝~ 짝~ 짝~ 그런데 약속한 10대를 다 때리기도 전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게 났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을까. 아이와 함께 한참을 울고 나니 체벌에 대한 마무리마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엄마 말 안 들으면 또 때릴 거’라는 경고는 헛된 말이 되고 말았다. 체벌은 그 한 번으로 끝난 것이다.
○○이는 온순한 편이다. 친구를 두루 사귀지도 않지만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다만 생활이 무질서했고 삶에 대한 의욕이 극도로 낮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난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내 힘만으로는 ○○이를 잘 키워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주문처럼 이런 말을 해줬다. “엄마는 네가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넌 안드레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아도 더러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겨 나를 속상하게 할 때면, 성당으로 데려가 고해성사를 하게 하고, 같이 미사를 드린 다음 외식했다. ○○이를 어떻게든 하느님 안에서 잘 키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에게 휴대전화기가 생겼다. 걱정거리 하나가 더 는 것이다. ○○이가 나쁜 짓을 할 리 없다는 확신이 있지만 혹시나 게임에 깊이 빠지게 될까 봐 늘 안절부절못했다. 느닷없이 집에 찾아가 아이가 뭘 하는지 살피고, 게임은 얼마나 하는지 감시했지만 다 소용없었다. 나와 만나는 시간은 길어봐야 하루 두 시간이고, 나머지는 집에서 생활하지 않는가. 우리 집에 오지 않는 주말은 더했다.
우려했던 대로 ○○이는 금세 게임에 깊이 빠져들었다. 게임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큰아빠가 사준 컴퓨터는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게임을 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고, 남들이 기상해야 할 시간에는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해 잠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빠지는 날이 숱했다.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컴퓨터에 시간 제약 ‘락’을 걸었고 일주일씩 길게는 열흘씩 휴대전화기를 압수하기도 했지만 다 부질없었다. 위기였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심지어 ○○이와 우리 부부와의 관계마저도.
때마침 ○○이가 아빠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난 ○○이가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가길 원했고, 미리부터 전국에 있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지만 도통 관심이 없었다. 제시간에 기상하여 하루를 시작하고, 제때 식사하며, 자야 할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건강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미래마저도 남 일처럼 방기했다. 미래에 대한 고민 따위는 아예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일단 게임에 빠져 있으면 모든 것들이 다 지워지나 보다, 추측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니까 각성상태가 되어 막상 잠자리에 누우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에 소스라쳤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또한 그러려니 했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차츰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은 그렇게 무색해졌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으로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이젠 어느 정도 컸으니까 지지고 볶더라도 친부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가끔 만나는 ○○이는 아빠와의 생활을 많이 힘들어했다. 손수 키워본 적 없는 아들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날마다 게임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졌겠는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가 조금씩 영글어가는 게 보였다. 고2가 되도록 공부와는 담을 쌓은 채 놀기만 하던 아이가 3학년이 되자 자격증에 관심을 두고 하나씩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지만 ○○이는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공부에 흥미도 없거니와 꼭 대학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가 좀 더 멀리 보고 높이 날기를 원했다. 한사코 거부하던 ○○이의 대학 진학이 확정되자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학교에 안 가면 어쩌지? 수시로 결석하다 자퇴하겠다고 하면(?) 그래서 대학에 진학한 다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가 많았다. “어디니?”라고 노골적으로 묻지 못하고 “○○아, 뭐하고 있어?”라고 물으면 “엄마, 학교에 있어요”라는 답문을 보내거나 점심시간에 “엄마, 수업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어요”라며 전화했다. 그러면 그냥 안부 전화를 한 거라고 둘러대거나 ‘언제 만나서 밥 먹자’라며 약속을 급조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이젠 학교 출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대학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어떤 선물을 해줄까 하다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이젠 네가 다 컸으니 맹목적으로 돈을 주지는 않겠다. 혼자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마음이 맞는 친구 한 명과 같이 가도 돼. 5일에서 일주일 정도면 좋겠는데 비용은 엄마가 내줄게. 대신 상세한 여행 계획서를 써 오렴.”
아이는 반색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상세한’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뭘 주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데 계획서라니. 그것도 ‘상세한’. 나는 우리가 여행할 때마다 만들었던 계획서를 보내주며 ○○이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먼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하고, 혹시 동행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와 의논하여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을지, 이동 수단은 무엇이고, 소요 시간은 얼마인지, 숙소는 어디가 좋은지 등을 정하면 된다고 일러줬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정하려면 일일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정보를 얻고 검색해야 하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의 첨삭을 거듭하며 결국 ○○이는 난생처음 홀로 여행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여행 첫날, ○○이는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하는 첫 기차를 타게 되었다. 매표를 서두르지 않아 마땅한 차표가 없었던 것이다. 집이 먼데 그 새벽에 기차를 타기 위해 어떻게 이동할 거냐고 물었더니 전날 밤, 서울역 인근에 있는 찜질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혹시나 차를 놓치게 될까 봐 염려되었지만, 그만큼이라도 고민하고 궁리했다는 게 대견하다 싶어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정해진 기차를 탔다며 ○○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이가 무슨 승리의 열차라도 탄 것처럼 환성을 질렀다. 한 고개를 넘었으니 다 잘될 것 같았다. 곳곳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찍어서 엄마에게도 보내 달라 하고,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면 꼭 전화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계획한 일정을 다 마친 ○○이가 서울역에 내려 전화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렁찬지 전화기 밖에서도 또렷이 들렸다. 곁에 있던 남편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목소리가 무척 커졌네. 힘이 넘치는 것 같아.” 그 여행을 통해 ○○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젠 자기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고 예전보다 훨씬 당당해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와 만난 지 17년. 하느님과 애초에 약속했던 10년을 채우고도 7년이 더 지났다. 지금 ○○이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성인이 됐다며 함께 술잔도 기울이고, 아프고 힘들었던 지난 얘기도 허물없이 나눈다. 자리가 끝나고 돌아올 때는 나의 안전을 염려하며 나를 도로 안쪽으로 밀어 넣고, 꼭 집까지 데려다 준 다음 돌아간다. 이젠 자신이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든든하고 고맙다.
이제 ○○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할 일은 없다. 그런데 후회가 많다. 더 좋은 엄마, 더 지혜롭고 따뜻한 엄마가 되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쉽다.
하느님은 우리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다 들으신다. 나는 한때 “어느 날 문득 내게 보육원이 맡겨지면 혼신을 다해 아이들을 돌봐야지”라는 식의 맹랑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 우리 집 앞에 아이를 두고 가면 무조건 데려다 키워야지”라는 속내는 사람들 앞에서도 수시로 드러냈었다. 하느님은 내가 혼자서 중얼거렸던 말, 마음속 생각까지 다 꿰뚫어 보시고 ○○이를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렇게 당신 계획대로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이의 아픔과 슬픔이 보석이 되는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