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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0) 하우현성당 - 교우촌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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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신유박해가 끝나면서 조선 정부의 칼바람은 잠잠해졌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가 사학으로 여겨져 신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히면서 가족, 이웃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의 박해가 이어졌다. 결국 신자들은 살던 곳을 떠났고, 신자들끼리 함께 모여 살아가기 시작했다.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 하우현에 자리한 교우촌

경기도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 하우현성당은 예로부터 교우촌이 있던 자리다.

성당 마당에 복자 한덕운(토마스)의 성상이 보였다. 한덕운은 하우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순교자다. 하우현에 정확히 언제 교우촌이 생겼는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한덕운의 활동을 볼 때 이미 신유박해 이전에 이곳에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덕운은 1800년 하우현 인근인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해 살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돼 1802년 순교했다.

신자들의 거주지는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초기에는 서울을 비롯해 교회지도자들이 머물던 경기도 양근·여주, 충청도 내포 지방·충주, 전라도 전주 등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더 이상 고향에 머물지 못하게 됐다. 겨우 박해를 피한 신자들은 비신자들 틈에 끼어 살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신자들은 하우현 교우촌처럼 다른 고장이나 큰 길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외진 산간지역에 교우촌을 만들어나갔다.

하우현은 교우촌을 이루기에 천혜의 조건을 지닌 곳이었다. 청계산과 광교산 자락 사이에 자리해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신자들이 숨어 지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게다가 서울과도 그리 멀지 않아 신자들과 교류하고, 또 사제를 찾아 성사를 받기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던 집과 재산, 논밭 등 삶의 기반을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당장 먹고 사는 일 자체가 위협을 받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신앙을 선택했고, 숲을 태워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굽는 등의 활동을 했다. 지금의 하우현성당에서는 박해시기 신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활하던 한덕운 복자가 신유박해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해 서울을 오가며 신자들의 동향을 살피다 체포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우현 교우촌의 생계에도 옹기가 관련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하우현은 박해시기 동안 신자들이 줄곧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중요한 교우촌이었다. 이후로도 하우현에는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이어가 1845년에는 이곳에서 살던 김준원(아니체토)이 체포돼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고, 1866년 순교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이곳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 교우촌의 확산

이런 교우촌의 확산은 신유박해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에도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있었지만, 1801년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전국의 거의 모든 신자들이 자기 고장에서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했고, 신자들을 이끌던 교회 지도층 신자들도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됐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상대적으로 박해의 풍파가 약한 다른 지방으로, 또 산간벽지로 흩어졌다. 신유박해 이후에는 전라도의 남쪽 지방과 경상도, 강원·황해·평안·함경도까지도 신자들이 이주해 신앙을 이어나갔다.

황사영(알렉시오)은 「백서」에서 “오가작통법이 있어 그 법이 몹시 엄하지만, 교우가 살지 않는 곳에는 오가작통법이 있어도 유명무실해 발을 붙일 수 있다”면서 “경기·충청·전라 3도는 본래 교우가 많고, 경상도와 강원도는 근년에 피난 간 사람이 더러 살고 있는 까닭에 염탐하는 관리가 이 5도를 두루 다니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들은 1830년대 이후 선교사들이 방문하면서 공소로 발전했고, 일부 공소에는 선교사들이 머물기도 했다.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사목보고서에 전국에 공소가 185개소 이상 있다고 밝히는데, 실제로 교우촌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교구 내에도 하우현을 비롯해 미리내, 수리산, 구산, 손골, 골배마실, 왕림, 단내, 사리티 등 많은 교우촌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교구 내 교우촌들은 대부분 서로 인접한 산간 지역에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교구 내 교우촌에는 경기도 지역에 흩어져 살던 신자들과 충청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만들어졌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삶의 터전을 떠나 교우촌을 이룬 신자들은 그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기존에 서학을 접한 양반 가문과 그 인근, 신자들이 활동하던 지역에 국한됐던 천주교는 교우촌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깊숙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한 신자들이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신유박해는 교회에 큰 타격을 줬지만, 오히려 천주교를 전국으로 퍼뜨리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이 귀양살이 하는 신자들과 피난 간 신자들을 아마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도자가 되게 했다”면서 “그들의 집들이 한 마을을 이루고 그들의 가족이 활발한 신자집단을 이뤄 조선의 가장 궁벽한 구석에까지 복음을 알렸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렸다”고 평가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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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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