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은 세계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 한국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1984년 10월 14일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 기념 경축 미사 강론 내용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 선조들은 훗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한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 영성을 일찍이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실천한 선구자들이었습니다.
해방과 전쟁 이후 오직 성장만을 목표로 달려왔고 그 결과 사회 전반은 압축 성장을 이루며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반대로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가치관은 무시당하고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은 손상됐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소외된 이들과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이념으로 갈라지는 사회를 방관하며 교회마저 양극화로 곪아 터져 ‘형식만 교회’인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양극화를 좁히기 위해서는 대화와 경청으로 연대하며 ‘공동선’을 이뤄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고질화된 성직주의의 벽은 너무나도 높기만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은 코로나 사태는 종교와 신앙의 미래에 관한 전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팬데믹 시기에 문을 닫은 텅 빈 교회를 예언적 경고 신호로 받아들였다. 교회가 변화를 이뤄내지 않는다면 교회도 곧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다.”(「그리스도교의 오후」) 이 말씀이 공허한 울림이 아니길 바랍니다.
지금 교회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주인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교회의 쇠락이 한 번에 그리된 것이 아니었음을 간과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심하게 서너 번 얻어맞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시대적 징표가 있었음에도 교회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변화의 샘물을 제공하지 못해 쇠락이라는 쓴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유럽교회의 현실이 곧 한국교회의 미래요 우리 본당의 미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찾아 나서기보다는 기다림의 사목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없는 교회 내 모든 시스템이 중산층에 최적화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시대적 징표 앞에 당당히 서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 안에서,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버린 것을 두려워하며 움직이기를 바라며, 아직도 우리의 문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니,”(「복음의 기쁨」 49항) “저마다 자기 공동체가 지닌 복음화의 목표와 조직, 또 그 양식과 방법을 과감하게 창의적으로 재고하도록”(33항) 권고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 방법에만 매몰되고, 통계’(63항 참조)에만 집착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다시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으로 산 이들이 아닌 어떻게 산 이들이 있었기에 변화되고 성장해왔음을 누구보다 평신도들이 먼저 깨닫고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갑진년 새해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각자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참다운 주인의식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최병민(안드레아·수원교구 공도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