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여름처럼 무덥고 습한 날이었지만, 그날은 조금 다른 날이었습니다. 오랜 와병(臥病) 중이셨던 할아버지를 가끔 문안 오던 서울 사는 큰고모가 또 한 번의 문안을 온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집안에는 간만에 웃음꽃이 피었고, 할아버지도 약간은 기력을 회복하신 듯 보였습니다. 한여름 날 무더위도 살짝쿵 뒤로 물러앉은 듯한 느낌이 드는 날이었습니다. 더욱이 여름방학 기간이었던지라 서울 사는 큰고모가 우리 집에 왔다는 것은 ‘서울 구경’을 하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해 주는 일이었기에 저와 동생은 한껏 들뜨기도 했던 날이었습니다.
역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낸 큰고모는 서울로 돌아가기에 앞서 “고모네 놀러 갈래?” 하면서 우리 둘을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둘은 무척 기뻤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갈 수 있었고, 저는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저의 ‘서울 구경’은 허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엄청 서운 섭섭하다 못해 슬펐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습니다. 신이 난 동생은 형이 울거나 말거나 고모와 함께 서울행 차에 몸을 실었고, 저는 여전히 섭섭함을 가득 품은 채철부지다운 투정을 부리면서 혼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얼마 후 할아버지께서 “성호는 할아버지와 함께 따로 갔다 올 곳이 있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투정이 사라지데요. ‘서울 구경’ 간 동생이 하나도 안 부럽고, 되려 뭔가 신비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호기심과 더불어 내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자부심마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시켜 여름철의 별미인 시원한 냉장 수박을 한 통 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고즈넉한 산속으로 저를 안내하셨지요. 이윽고 다다른 비탈진 언덕! 그 언덕에는 누군가 깊게 파 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구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묻히시고 영원히 잠드실 곳이 바로 이곳이란 것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어린 제 눈 앞에 펼쳐진 그 커다란 구덩이는 흡사 광활한 우주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을 큰손자인 나에게 먼저 보여주시려고 서울행을 허락지 않으셨구나!’ 싶어서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깊은 심연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성호야! 와서 수박 먹어라!” 하신 아버지의 부름 덕분에 간신히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픔과 고통을 달게 이겨 내시다가 그 해 시월에 하느님 품에 드셨습니다. ‘더울 때 죽으면 식구들 고생 시킨다’고 하시더니, 정말 지루했던 여름이 지나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하루 일과는 언제나 세 가지의 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안방 벽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는 일, 당신 손목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는 일, 그리고 매일 일일 달력의 한 장씩을 찢어내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는 이 모든 일을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듯 매우 숭고하고 거룩하게 해 나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시간은 단순한 시간, 즉 몇 시 몇 분을 가리키는 ‘크로노스’(χρ?νος)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영원의 시간, 소중한 추억들로 가득하고, 그것들이 오랜 기억으로 간직될 정성스런 마음이 가득한 시간 ‘카이로스’(καιρ?ς)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카이로스’를 담는 그릇인 시계를 그토록 애지중지 다루시면서 매일 태엽을 감아주셨던 것이겠지요. 매일 아침마다 달력을 한 장 한 장 찢어내실 때도 비슷한 마음이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회계 장부’, ‘빚 독촉’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칼렌다리움’(calendarium)이라는 라틴어로부터 왔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매일매일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물처럼 주신 날임을 알고 계셨기에 그분 마음에 보답하며, 하느님께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언제나 성실한 한 인간으로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오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매일 아침 달력 한 장을 찢어내시면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겠다!’, ‘후회스럽고 미련이 남는 어제는 오늘로서 끝내고 온전히 찢어내 버리리라!’ 하셨을 것입니다.
한 번은 제가 입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마침 병실 밖에서 누군가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하고 많은 벨 소리 중에 가수 송대관 씨의 ‘해뜰날’이었습니다. 이는 할아버지 생전의 18번인 노래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었지만, 할아버지께서 큰 손주 신부를 낫게 해 주시려고, ‘성호야, 이제 괜찮다~’ 하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쨍! 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저물어 가는 2024년. 못내 아쉽고 석연치 않은 시간들이 떠오르지만, 매일 아침 할아버지께서 그러셨듯 아무런 미련 없이 달력의 마지막 장을 찢어내려고 합니다. 그래야 2025년의 해뜰날이 ‘쨍!’하고 찾아오겠지요. 내일 아침은 여느 때보다 일찌감치 일어나 할아버지께서 그러셨듯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시계의 태엽을 감아줘야겠습니다. 그 힘과 정성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렵니다.
글 _ 노성호 신부 (요한 보스코, 수원교구 명학본당 주임)
2004년 사제 서품. 평택 효명고등학교 교목, 수원교구 모산골, 양평, 죽전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명학본당 주임소임을 맡고있다. 한국교회 최초의 노래하는 형제 사제 듀오로, 동생 노중호 신부와 함께 2016년 Nobis Cum (노비스꿈) 1집 ‘우리와 함께’를, 2022년 2집 ‘또 다시 우리와 함께’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