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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집 누나

[월간 꿈CUM]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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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꿈CUM


입시철이면 생각나는 누나가 있다. 지금은 어디서 사시는지 소식을 모르고 지낸 지 오래다. 입시가 가까운 어느 날 누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동네 길을 지나다 마주치기라도 할 때는 눈인사만으로 지나치던 터라 뜻밖이었다. 반갑기도 하여 얼떨결에 수줍게 맞았다.
“공부하기 힘들지는 않아? 얼마나 어려움이 많겠니?”

“아니요,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예비고사 끝날 때까지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면 어떨까? 빈방이 하나 있으니 공부하기엔 분위기도 괜찮고, 조용하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힘들게 공부하는 것 같아 너무 안쓰러워서 하는 말이지. 방세 걱정은 하지 말고, 입시 때까지만 와서 편하게 공부하렴.”

너무나 감사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모처럼 마련해주신 좋은 환경에 감사해서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 누나는 이따금 귀한 커피를 타서 주시기도 했다.
때로는 고물 탁상시계가 12시를 넘기면 졸음이 오기도 해서, 차라리 시계를 볼 수 없게 돌려놓고 공부에 몰두했다. 이른 새벽, 창호지를 바른 문이 훤해지는 시각을 맞으며 밤을 새워 공부했다는 흐뭇함에 스스로 대견스러워 나를 칭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수학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달려가니 책을 한 권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번에 새로 나온 객관식 수학책이다. 다 풀어보고 가지고 오너라. 이번 예비고사는 4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로 출제되니 연습을 해 두면 도움이 될 것이야.”

새 책을 손에 든 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책을 살 형편이 못되니 남들의 책를 보며 부러워만 했었다.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어가는 동안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몇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다 풀어 책을 덮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찼다. 

이튿날 수학책을 들고 선생님께 책을 내밀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니 이 녀석아, 다 풀고 가져오랬잖아.”

“선생님! 다 풀어보고 가져왔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놀라시며 주변 선생님께도 자랑을 하셨다.
“아니, 이 녀석이 글쎄 이 수학책을 5일 만에 다 풀었다네요.”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다소 불편할 뿐이다’라는 말을 항간에서도 많이 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말에 공감하며 살아왔다. 나에게서 가난의 체험은 오히려 학생들과의 생활에서 큰 영양소가 되기도 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난하고 지쳐 있는 학생들이 먼저 눈에 띄었고,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삶을 조금이나마 닮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그리 쉽게 실천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새해를 맞으며 더욱 가난한 이웃, 고통받는 이웃을 생각하며 살자고 굳은 다짐을 하게 된다. 


글 _ 정점길 (세례자 요한, 의정부교구 복음화학교 교장)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 38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다. 2006년 3월 「한국수필」에 등단, 수필 동호회 ‘모닥불’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카리타스 봉사단 초대 단장, 본당 사목회장, 서울대교구 나눔의 묵상회 강사, 노인대학 강사, 꾸르실료 강사, 예비신자 교리교사, 성령기도회 말씀 봉사자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의정부교구 복음화학교의 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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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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