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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성모성월특강(4) 조규만 주교

하느님 걸작은 바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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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의 존엄성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반생명 문화에 반대한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종교, 생명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님은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육화 사건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을 만큼 인간이 하느님께 긍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한다.
 
 ▲육체적 근거 - 신비롭고 정교한 걸작품
 창세기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보시기 좋은 작품이 바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몸, 얼마나 아십니까?」라는 책에 의하면 인간 세포는 60조 개다. 신경세포는 300억 개나 된다. 우리 피부와 피막은 1억 장이 겹쳐져야만 1㎝가 될 정도로 얇다.
 340g밖에 안 되는 심장 역시 놀랍다. 매일 9만6000㎞에 달하는 혈관에 1만5000ℓ의 피를 공급하며 70~80년을 버틴다. 우리 몸의 신비스러움 자체가 인간의 귀중함을 알려준다.
 
 ▲구약에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 - 하느님의 모상
 창세기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는 하느님 말씀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만큼 인간 창조는 다른 어떤 창조보다 하느님에게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성경은 하느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월의 하느님이다. 곧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또 하느님을 인간동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모두 동등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이다.
 
 ▲신약에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 - 하느님의 자녀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죽음 모두가 인간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삶 전체를 인간 사랑으로 일관하셨던 예수님은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셨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모상`보다 적절하고 실제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드러낸다.
 언제부터 인간이냐는 과학자들 질문에 교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라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기 전에는 생명으로 다루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권한인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인간복제에 관한 성찰」(1997)에서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 인간 복제를 비도덕적이라고 규정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 - 하느님의 육화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고백한다. 신학은 이를 하느님의 육화 또는 강생이라 표현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육화사건은 하느님이 사람이 될 만큼 인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는 하느님과 대화와 친교를 나누는 상대라는 점에 있다. 하느님 대화 상대자란 교부들이 신화(神化)라고 표현한 것처럼,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도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눠 받게 하는 무한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현상학적 근거 - 유일회적 삶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교 교리도 인간 생명의 유일회성을 말한다. 불교는 윤회설을 얘기한다. 해탈은 그 끝없는 반복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영원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불교 윤회설과는 다르다. 윤회의 삶은 반복되는 삶 때문에 현재 삶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고,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불교의 윤회설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삶의 유일회성 때문이다. 국제신학위원회는 삶의 유일회성에 근거한 소중함과, 현세 삶은 영원한 내세 삶을 위한 영원한 흔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단 한 번의 인간적 삶을 사는 만큼, 우리 삶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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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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