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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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한 시처럼 살다간 아름다운 영혼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8) 장영희 마리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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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목발

장영희(마리아, 張英姬, 1952~2009)의 발자국 소리는 크다. 10m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 보조기까지 합쳐져서 내는 ‘정그렁’ 소리는 크게 들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가장 힘이 들 때는 책을 찾으러 ‘도서관을 헤맬 때’라고 했다. 목발 때문에 책을 들고 옮길 수가 없었다. 또 원하는 책을 찾았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그 사람에게 책을 자기 자리까지 옮겨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온종일 책만 옮기다가 하루가 지나간 날도 있었다. 필요한 책을 겨우 찾아 읽고 글을 쓰려고 하면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다.

장영희는 누가 자신에게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목발’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장영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목발에 의지했다.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목발이 부러지면서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굴렀다.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하고는 기숙사로 연락해 룸메이트가 휠체어를 가져왔다. 뉴욕에 사는 오빠는 그 얘기를 듣고 다음 날 달려왔다. 그러곤 독일제 새 목발을 사주었다. 그 목발이 지금 짚고 다니는 목발이었다. 그 목발은 주인과 함께 늙어 몸통이 긁히고, 패이고, 불에 탄 자국까지 생겼다. 언니가 그 낡은 목발을 보고 미제 ‘알루미늄발’을 보내왔다. 세상에서 본 목발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목발’이었다.

어느 여름날, 장영희는 미국 유학 중에 방학을 맞아 집에 다니러 왔다. 동생이 명동으로 쇼핑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구멍 난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다. 생전 처음으로 명동에 갔다. 동생이 어떤 가게에 걸린 원피스가 눈에 들었는지 한 번 입어보겠다고 했다. 그 가게의 문턱은 너무 높아 목발을 딛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 가게 주인 같은 사람이 가게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장영희를 보더니 이런 말을 갑자기 내뱉었다. “나중에 와요. 손님이 있는 거 안 보여요?” 장영희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그 사람은 이어서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고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동생은 옷을 입다 말고 그 사람에게 우리 언니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고 대들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장영희는 연구실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하고 있었다. 성적을 평가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A나 B, B나 C의 경계선에 있는 학생들의 성적이었다. 늘 ‘혹시 그 학생이 청년 가장은 아닐까? 혹시 부친이 실직 중이지 않을까? 혹시 낮은 성적을 주어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등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등의 고민을 했다. 장영희는 ‘어떤 학생’의 영어 발음이 수업 중에 정확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B+와 A- 중 어느 것을 줄 것인지 고민하다가 연구실을 나왔다. 다음 날, 출근길 신촌로터리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다가 전철 입구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에 나무 부채와 여성용 스카프를 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지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다가가더니 부채 두 개를 집어 들고는 돈을 냈다. 노인은 기뻐했다. 그 젊은이는 부채가 필요해서 산 것이 아니라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이 불쌍해서 그 부채를 산 것이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그 ‘어떤 학생’이었다. 연구실에 오자마자 그 학생의 성적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A를 주었다.



안타까운 일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퇴근하려고 연구실 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문 앞에 짧은 머리에 해쓱한 얼굴의 깡마른 학생이 혼자 서 있었다. 오랫동안 복도에서 서성이며 연구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 같았다.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학생은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고통이며 병원 약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장 교수는 종교를 가지라는 말, 이성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말 등으로 충고했다. 그러고는 저서 한 권을 주며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학생을 다시 오게 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생은 장 교수의 수업을 듣는 청강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 학생이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자신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독후감을 제출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유서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해당 학과에 연락해 그 학생을 찾으라고 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이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장영희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빈 껍데기 같은 말로 위로해 준 것이 후회되었고, 끝까지 그 귀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재현아! 너무 늦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재현아, 미안해. 네 믿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네 생명을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수필 ‘재현아!’에서)

 



장영희의 ‘마리아’

장영희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두 번 놀란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두 번째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놀란다고 했다. 장영희는 어렸을 때 유아 세례를 받았다. 사람들이 세례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리아’라고 씩씩하게 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웃었다. 그러면서 “장 선생님같이 씩씩하신 분이….”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방송국 인터뷰에서도 사회자가 “‘마리아’치고는 아주 톡톡 튀십니다”라고 했다. 이렇듯 ‘장영희’와 ‘마리아’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장영희는 성경 속의 마리아는 수동적이고 얌전하며 눈물이 많은 여왕이 아니라고 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을 때 마리아는 무조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지 않았냐고 했다. 그리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정교한 논리로 질문도 하지 않았냐고 했다. 특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로 시작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적극적이고 씩씩한 노래라고 했다. 그래서 ‘마리아’라는 세례명은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죽음의 그림자

장영희는 하버드대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세계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진 날짜에 병원으로 갔다. 침대에 눕고는 가슴 검사를 했다. 의사는 가슴에서 커다란 돌기가 잡힌다고 했다. 다음 날 더 정확한 검사를 하기 위해 매모그램 검사와 초음파 검사 그리고 조직검사까지 했다. 그 결과, 왼쪽 가슴에 2~3기 정도의 암이 있었다. 의료진은 서둘러 수술했다. 그때부터 암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생긴 암은 미국 병원에서의 두 번 수술과 귀국해서 받은 방사선 치료로 완쾌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암이 다시 척추로 전이되었다.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2년 동안 힘들게 항암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치료 효과가 좋아 완치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암이 척추에서 간으로 전이되었다. 더욱 강도 높은 항암제를 맞았다. 약명이 아드레마이신인데 ‘빨간약’이란 별명을 가진 약이었다. 암 환자들은 소변까지 빨갛게 나오는 그 빨간약을 보기만 해도 공포심을 느낀다. 다시 발병한 간암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병은 심해졌다.

결국 화창한 봄날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영희는 세상과 이별했다. 서강대 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 운구가 캠퍼스를 돌았다. 장영희 교수의 연구실이 있던 건물에 운구가 들어갔을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건물 앞뜰, 장 교수가 씨앗을 심고 목발로 흙을 덮어주었던 그 자리에 예쁜 꽃이 피어있었다.



추모 낭독회에서 터져나온 웃음

장영희가 가장 좋아한 시는 에밀리 디킨슨이 지은 ‘만약 내가’라는 시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쳐 있는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장영희는 시처럼 세상을 살다가 갔다.

장영희 10주기 추모 낭독회가 서강대에서 열렸다. 낭독회에는 가족과 지인 그리고 제자 등이 참석했다. 로만 칼라를 한 어떤 신부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한 번은 만우절에 수도원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아름다운 분홍색 봉투에 ‘이소라’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었더니 첫 줄에 ‘야 치연아. 나 장영희다.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련 받아’라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신부는 그 편지 덕분에 지금까지 수도생활을 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숙연했던 추모 낭독회에 그 신부는 한바탕 맑은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참고 자료 : ▲장영희. 「내 생애 단 한번」. 샘터. 2010 ▲장영희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샘터. 2011 ▲장영희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위즈덤하우스. 2012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 2019 ▲장영희 외 32인 「아버지의 추억」 따뜻한 손. 2010 ▲장왕록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샘터. 2004 ▲채널 예스 뉴스(2019.5.16.) ‘기적을 알려주고 간 사람, 장영희 교수 10주기 추모 낭독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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