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 폐지로 생명의 문화를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그분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그 생명 또한 존엄합니다.
따라서 창조주가 아닌 어느 누구도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박탈한 권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국가나 다른 어떤 ‘권위’에 의해서 사형제도가 존속해 오는 현실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죽음의 문화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범죄예방이라는 명분으로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사형제도는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제기되는 “사형제도의 존속이 범죄를 예방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단지 추상적인 가정에 불과하며, 실제적인 영향력은 확인된 바도 없고, 미지수입니다. 따라서 사형이 아닌 다른 형벌을 적용하는 것이 공동선과 인간의 존엄성 수호에 더욱 부합하는 것입니다.
2007년 현재, 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131개국에 이릅니다. 사형제도를 존치하고 있는 나라는 66개국으로서, 이 가운데 우리나라를 포함한 29개국에서는 제도상으로만 사형제도가 존재할뿐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실질적인 사형폐지국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올 연말이면 실질적인 사형폐지 국가가 됩니다.
1980년대 이후 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 등 여러 인권 기구와 단체들은 사형을 폐지하거나 최소한 사형집행의 중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98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사형폐지를 목적으로 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에서는 인권 규약상의 생명권 개념에 사형폐지를 당연히 포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형폐지를 촉구하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전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미 1995년에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 사형은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하는 경우에 조차도 사형제도에 대한 공적인 반대가 커지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고 지적하시며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극단까지 가서는 결코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형벌이든 범죄자들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절대 말살할 수는 없다”면서 “회개와 갱생의 모든 기회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인격과 존엄성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틀은 바로 정의로운 사회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보장은 인간생명과 인간성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국가, 사회, 종교단체가 다 함께 인간 중심의 공동체 질서를 마련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천년을 살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힘과 지혜를 모으는 이때 우리 모두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공동체의 그 어떤 것도 결국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생명의 문화를 정착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일은 우리 모두의 으뜸가는 사명입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위원회와 가톨릭신문사가 공동으로 펼치는 ‘사형, 폐지되는 그날까지’ 릴레이 기고는 종교인들을 비롯해서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많은 이들의 강한 의지를 널리 표명하고,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초석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울러 한국의 현 정부가 우리의 이러한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최초로 사형제도가 없는 나라,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로 거듭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