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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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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날이 오고야마는 것인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당하여 한 시대를 함께 산 이들과 더불어 가누기 힘든 애도의 묵념을 바친다.
김수환 추기경은 일생 동안 중첩되는 고난의 역사 속을 헤쳐 왔으며, 만년의 몇 해 동안은 인간적으로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을 가까이에서 뵙게 된 것은 1971년 여름부터였다. 1968년 46살에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고 바로 다음해에 세계에서 가장 젊은 추기경이 된 후 2년째 되는 해였다. 그 해에 서울대교구는 일제강점하 1930년대로부터 간행해 오던 월간 잡지 「가톨릭 청년」을 「창조」로 개제하고 새로이 편집 진용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때 편집 책임자로 내가 권유를 받아 서울대교구가 경영하는 가톨릭출판사에 입사해 「창조」 잡지의 창간에 착수했다. 가톨릭출판사와 「창조」잡지의 발행인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이 「창조」 잡지는 가톨릭 정신을 바탕에 깔고 한국 사회의 지성인들을 필진으로 동원했다. 지난 날 권위와 명망을 지녔던 「사상계」 잡지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폐간된 직후였으므로 「창조」 잡지에 대한 사회의 호응이 컸다. 교회의 사회참여가 촉진되는 현상이었다.
발행인인 김 추기경은 자신의 명의로 된 권두언을 잡지에 실었고 별도의 기고도 실었다.
1971년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은 해였다. 이 해 4월 22일 이미 김 추기경은 3선개헌 이후 처음으로 치르게 되는 4ㆍ27 대선에서 국민이 양심대로 투표하기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회참여에 적극적
그 뒤 결정적인 중대 사건이 그 해 성탄절의 명동성당 자정미사 강론에서 불거졌다.
당시 집권 여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던 이른바 국가보위법이 과연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 외침을 막기 위한 것인지를 정부와 여당을 향해 추궁하는 내용이 김 추기경의 강론 속에서 제기되었다. 생방송으로 자정 미사를 중계하던 KBS 텔레비전이 당황해서 보도를 중단했다.
이것은 바로 다음해에 있게 되는 유신헌법의 선포로 미루어 생각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집권 의도가 절정에 이른 고비에서, 감히 그 누구도 감행할 수 없었던 반독재 저항의 기폭제였다.
정부가 위수령을 선포해 군대가 대학가에 진입하기도 했던 살벌한 상황이었지만, 국민은 김수환 추기경의 성탄 강론을 통해 민주회복의 희망을 새로이 내다보게 되었다. 일반 대중이 가톨릭교회에 대해 존중과 기대를 보내게 되었다.
이 뒤를 이어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지 주교의 석방운동을 위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사제단은 이어서 민주회복 운동을 행동적으로 전개해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진출했다. 이 일련의 역사 진전 현장의 복판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6월 10일 밤에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온 데모 학생들의 손에서 돌멩이와 화염병을 내려놓게 한 것이 김 추기경이며, 이들이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게 경찰의 보장을 받아낸 이도 김 추기경이었다.
그리고 김 추기경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민주화 개헌을 직접 권고했다. 6월 29일에 그 개헌은 이루어졌다. 이것이 6월 시민항쟁의 마무리였다. 여기까지가 김 추기경 당대의 역할이 위업을 달성하는 단계였다. 그 다음의 현실 감당 문제들은 정치분야의 몫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소신학교 시절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일기장에 적어 놓아 퇴교를 당할 뻔했다. 일본 상지대학 유학 중에는 학병 징집 기피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역시 조선 청년으로서의 의기를 드러내 사관후보에서 탈락하고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그가 배속된 일본군이 태평양의 찌찌시마라는 섬에서 미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김수환 학병이 나서서 미군 지휘부를 설득해 조선인 학병과 노무자들을 일본군으로부터 격리시키고 귀국 길에 오르게 했다. 자신은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이것은 마치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홍해를 건너온 모세와 같은 모습이다.
신부가 되고 유럽 유학을 가서 그는 로마 바티칸에 있는 세계적 미술품인 성상 앞에서 5분쯤 서 있었다. 그런데 국내의 경주 석굴암 불상 앞에서는 한 시간이 넘게 서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인들만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지. 모든 사람 모든 종교 안에서도 하느님이 역사하시지. 예수는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도 칭찬하셨지. 그는 가톨릭 교회의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선언」에 공명하는 열린 마음의 성직자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회참여 선언에 가장 충실한 고위 성직자가 김 추기경이었다. `사회참여`에 관해서는 "당연히 누룩이 되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좌경` 현상을 문제삼는 이에게는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는 사회가 좌경을 만든다"고 했다. 요는 민주화를 이룩하면 된다고 했다.
#온유 인정 신의 중시
`통일`을 추진하는 논의는 당연하고 다행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가치의 질서로 통일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선통일`주의로 서두르는 데에는 가치가 없고 실제로 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없으면서 혼란을 일으킨다고 했다. 자유와 민주화가 우선이라고 했다. 본질적이고 원칙적인 것이 특히 성직자의 자세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진보와 선통일 주장의 인상을 받는 쪽에서는 실상 자신들도 공산화 통일을 왜 꿈꾸겠느냐고 부정한다. 다만 교류의 확대가 있어야 민주화 통일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정점의 고위 성직자로서 인간 본성과 자연법적 질서에 입각해 자유와 인권의 원칙을 계속 일깨워야 할 입장에 있다.
가톨릭 안에서는 원래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없다. 피상적 양분법과 대결의 조장은 부정된다. 어떤 이는 봉쇄수도원에서 천상 희망을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어떤 이는 노동사목이나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현세질서 쇄신에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역할의 분담이며 일치 안의 다양성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보다도 온유ㆍ인정ㆍ신의를 중시했다. 단식농성장의 여공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 어느 사형수의 무기 감형을 진정해 이루어낸 일, 시국사건 투옥자의 석방을 요구해 성사시킨 일, 주변 젊은이들의 직장을 알선하는 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 섬세하게 배려하고 공을 드리는 많은 일로 김수환 추기경은 쉴 틈이 없었다.
"추기경님께서 어떻게 개인의 사적인 일에 나서십니까?" 옆에서 만류를 하면 "공자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