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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단 설득하며 노동자 권익옹호에 앞장
소외된 이와 늘 함께 하는 ‘마음 넓은 분’
가톨릭신문은 김수환 추기경의 86년 생애를 되돌아보는 기획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을 연재한다. 새 기획은 김수환 추기경 생애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만난 이들의 회고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추기경의 숨겨진 면목과 삶의 모습, 뒷이야기를 담는다.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의 첫 주인공은 윤공희 대주교(前 광주대교구장·86)다. 윤 대주교는 196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40여 년 가까이 한국 교회 주교단으로 함께 활동했다. 특히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될 당시 서울대교구장 서리였으며 한국 교회 첫 추기경 탄생 때는 주교회의 의장을 맡는 등 김 추기경이 한국 교회 고위 성직자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시기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지켜본 산 증인이다. 윤 대주교와의 만남은 김 추기경의 장례미사 하루 전날인 2월 19일 마련됐다.
◎ 인연의 시작
내가 남으로 내려온 195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김수환 추기경님과 전 항상 근처에 있었지만 그리 가까운 인연은 아니었어요. 추측컨대 내가 1950년 사제품을 받을 때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 계셨을 것이고,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과 대구를 오갈 때 추기경님은 대구대교구 신부님이셨죠. 얼핏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생각만 할 뿐이죠.
사실 유학도 같은 해(1956년) 유럽으로 떠났어요. 나는 로마에 추기경님은 독일에 있었고 유럽에 유학 온 한국 신부들이 만나는 시간이 종종 있었기에 아마 추기경님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만 할 뿐이죠.
그러고 보니 주교가 된 후(1963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제가 가톨릭시보에 공의회 소감을 적은 글을 한번 보낸 적이 있네요. 공의회 소식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 가톨릭시보를 꼬박꼬박 읽어보던 차에 제게 공의회 참석 기회가 주어졌고 전 소감을 적어 보낸 적이 있어요. 추기경님이 그 당시(1964년) 사장이셨으니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 주교회의의 젊은 피
제가 1963년 주교품을 받았고 65년에 지학순·황민성 주교님, 그리고 추기경님이 66년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죠. 당시 이 네 명의 주교는 요즘 말로 젊은 피였죠. 당시 한국 교회를 위해 뭔가 열심히 일해보자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주교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1968년 한국 주교단이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낸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 공동사목교서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담당이던 추기경님께서 직접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준비해 상임위원회에서 발표하셨어요. 추기경님은 교회가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계셨죠. 당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저는 준비된 교서를 발표했고 추기경님께서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답변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 서울대교구장 서리 시절
1967년부터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으며 교황님께 한 두 번인가 편지를 보낸 것 같아요. 이제 교구가 안정됐으니 저는 수원교구로 돌아가 일을 했으면 한다. 서울에 새 교구장님께서 임명되셔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곧 추기경님께서, 당시에는 김 주교님이셨죠, 서울대교구장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서울대교구장 서리라는 큰 짐을 덜었다는 게, 그리고 김 주교님이 서울로 오신다는 게 기뻤어요. 당시 교황청 포교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 아가지아니 추기경은 제 세례명을 빗대어 (십자가 벗어놔서) ‘VICTORY(승리)’했다고 할 정도였죠.
사실 전 큰 짐을 덜었지만 추기경님께 많은 숙제를 떠넘기고 간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요. 신학교 문제가 기억에 남네요. 제가 서리를 맡을 때 서울관구 주교님들끼리 서울 신학교를 관구 신학교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전 수원교구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이 일을 추진해 관구 신학교로 만들라는 교황청 교령까지 나오게 됐죠. 그런데 서울 신부님들이 들고 일어난겁니다. 어떻게 관구 신학교로 할 수 있느냐는 거였죠. 교구장으로 오신 지 얼마 안 된 추기경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추기경께서 직접 로마로 가 교구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등 고생이 심하셨다고 하더군요. 결국 교령만 나왔지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당시 그 일 때문에 크게 야단스럽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가 잠시 서먹서먹하긴 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 주교회의에 함께 몸담으며
추기경님과는 이웃교구 교구장으로, 또 같은 관구 주교로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주교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한국 교회의 경사였던 추기경이 탄생했으니 정말 기뻤죠. 에피소드라 할 것도 없지만 추기경님이 의장을 맡아야지 왜 윤 주교가 주교회의 의장을 계속 맡고 있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주교회의가 열릴 때는 순서에도 없는 추기경님 ‘한 마디’ 순서를 넣기도 했죠(웃음).
추기경님과 함께 했던 1970년대는 우리 사회 격동의 시기였죠. 당시 추기경님과 저는 주교회의 의장과 부의장을 번갈아 맡으며 그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갔어요. 어려움이 많았죠.
그때마다 추기경님은 지도적인 역할을 잘 해내셨어요. 당시 주교회의에서는 추기경님을 ‘호메이니’라고 불렀어요. 정부의 정책과 상관없이 이란 국민의 추종을 받던 이란의 지도자죠. 상임위원회에서 어떤 사안이 결정되더라도 추진하기 전에는 ‘호메이니 옹’에게 꼭 물어보자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추기경님은 그만큼 교회의 역할을 잘 정리해주시는 분이었어요. 사회가 교회에 거는 기대를 잘 이해하시고 그때마다 주교님들을 설득하고 교회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셨죠. 그런데 참 외로우셨을겁니다. 추기경님의 사회적 발언이 알려진 것처럼 항상 환영 받은 건 아니잖아요. 교회 내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죠.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유 이제 모 끝날 때가 있겠죠. 하느님께서 끝내 주실 때가 있을 겁니다.”
◎ 80년 광주에 온 편지
광주민주항쟁 당시 제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위원장을 맡았다는 소식을 추기경님이 들으셨던 것 같아요. 광주가 고립돼 연락할 길이 없자 추기경께서 한 장군에게 부탁을 해서 편지를 보낸 것 같아요. 편지는 서울대교구 군종신부와 광주대교구 군종신부(광주 상무대)를 거쳐 제게 왔습니다. 편지에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곤란하다는 말, 평화스럽게 잘 해결되길 바란다, 다 같이 함께 기도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인 천만원도 들어 있었죠. 당시 참 힘들었는데, 물론 다른 교구에서도 걱정해주고 있다는 건 믿었지만, 직접 편지로 상황을 걱정해 주신 추기경님 편지가 큰 힘이 됐어요.
◎ 마지막 만남
지난 해 가을인가 최창무 대주교님과 함께 문병 갔던 적이 있어요. 우리가 병실에 들어가니 추기경께서 ‘윤 대주교가 부러워. 건강하니깐 부러워’하셨는데 그게 마지막 인사였네요. 많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