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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을 입으며] 우연적 일치를 필연적 결과로/이용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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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보다는 괭이를 더 가볍게 여기는 제게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여기며 몇 자 적어봅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기 이전에 이미 섭리된 존재(성부와)이고, 섭리된 우리는 지구의 방문객(성자와)으로 왔으며,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일정기간 수행한 후, 본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삶(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파견한 분으로부터 파견된 우리는 영원히 지구에 머물지 않을 것이기에 목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지구를 ‘하느님의 제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제단 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볼 때, 부르심을 받아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파견한 분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온 정성과 열의를 다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랜 기간 순교성지 전담사목을 하며 부르심과 선택에 대해 순교자들의 삶 안에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순교자의 삶은 한마디로 나 중심의 ‘작은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큰 나’를 채우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좁은 문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며, 어리석은 바보가 아닌 지혜로운 바보의 삶의 길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들의 권위의식, 아집, 편견, 부정, 가면, 군상 등을 소각하고 진정한 평화, 즉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우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제 탓이요’ 하면서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베푸소서’하면서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 유혹에 적당히 타협하는 상대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서도, 하느님의 요구를 철저히 준행하는 절대평가에 둔감해서도 안 됩니다. 즉 기쁨의 부르심(갈릴래아의 부르심)인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안이한 삶을 살며 구원되리라 생각해서도, 고통의 부르심(예루살렘의 부르심)인 나머지 여섯 가지 성사의 삶에 결코 소홀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고통의 부르심’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는 자에게 사랑의 매를 드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견책과 매는 고통을 통한 생명의 불꽃이요, 미성숙을 통한 성숙에의 밑거름이며, 하느님의 진정한 삶을 향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나고 각진 돌의 모습을 둥근 돌의 모습으로 바꿔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세상에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고, 성모님은 하늘을 향해 “이 몸은 당신의 종입니다”라시며 세상에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청했으며, 요한 바오로2세는 하늘을 우러러 “나는 행복합니다”라며 세상을 향해서 “그대들도 행복하기를” 전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하늘에 “주님 고맙습니다”라며 세상에는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멋진 신앙의 유언을 남기는 성령의 결실을 맺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갈릴래아의 부르심’은 ‘예루살렘의 부르심’으로 가야하며, ‘예루살렘의 부르심’은 ‘갈릴래아의 부르심’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성숙의 단계에서 성숙의 단계로, 내적인 삶에서 외적인 삶으로, 회개에서 보속으로, 제자에서 사도로, 부르심에서 응답으로, 소명에서 사명으로, 하느님사랑에서 이웃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 동참하고픈 원의로 1984년에 수원신학교에 들어섰던 저는 1990년 11월 23일 수원신학교 출신으로는 첫 번째로 사제품을 받으면서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다음의 글을 전하며 사목의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부르심,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응답했습니다. 연후에 못자리라는 옥토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 교수신부님들의 관심과 사랑에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아울러 세속의 세파에 눈물을 삼켰습니다. 성장하여 나는 미성숙의 성숙을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설익은 낱알, 이제는 세인들에게 잘 먹히기 위하여 정미소를 향합니다. 껍질이 벗겨졌습니다. 부족함 없이, 조촐한 마음으로. ― 빵이 되었습니다. ― 기쁨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희열의 눈물을 삼켰습니다. 하루의 해가 고개를 돌리고 서산 건너로 넘어서면, 나는 이제 길을 떠나야 한다.’

이 길 또한 우연의 길이 아닌, 이미 섭리된 필연의 길이 아닌가!

 
이용남 신부·죽산성지 전담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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