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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문 닫은 상점들, 부서진 건물들, 깨진 유리창들,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들, 여기가 서울 도심인가 싶은 곳. 지난 1월 20일에 일어났던 용산 참사 현장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났다. 우렁찬 매미 소리는 어느덧 가냘픈 풀벌레 소리로 바뀌고, 참사가 일어났던 남일당 건물에 차려져 있는 분향소, 날마다 이곳을 지키는 유가족들과 철거민 회원들.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다.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노래와 공연이 있고 추모제와 촛불 문화제가 열리는 것 외에는. 그곳에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다. `누가 너의 이웃이냐?`
날마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교우분들이 이곳을 찾는다. 혼자서 또는 두세 명,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도 있고 멀리서 버스를 대절해 찾아오기도 한다. 여름 프로그램으로 이곳을 찾은 청소년, 청년들도 있고 현장체험을 하는 수녀님들도 계시다. 참사로 세상을 떠난 다섯 분의 유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철거민들에게도,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도 기억하기조차 힘들고 싫은, 끔찍한 참사현장! 그들은 왜 이곳을 찾을까?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찾기 위해? 과연 그들은 와서 누구를 만날까?
착한 사마리아인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웃이란 개념은 흔히 말하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 개념이다. 같은 동네에 산다고, 옆집에 산다고 이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그 사람은 내 이웃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을수록 더 가까운 이웃이 된다. 여기 용산 참사 현장을 찾는 사람들은 바로 이웃을 찾고 이웃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가지셨던 "가엾은 마음"(마르 6,34)이 전부였다. 이는 어떠한 생각이나 논리, 이론, 이익을 뛰어넘는 행동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무슨 이익을 보자고, 어떤 도움이 된다고 이곳을 방문하고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미사를 봉헌하겠는가! 우리의 이웃사랑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베푸는 데 너무 생각하고, 분석하고, 따지고, 눈치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다른 데서도 도움받고 있는데요." "감사할 줄을 몰라요." "도와주면 딴 짓 해요." "괜히 이용당해요."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설사 그 일로 오해를 받고 불이익이 돌아오더라도!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