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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41. 고해성사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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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죄에 합당한 벌도 반드시 주십니다. 이 때문에 고해성사 때 ‘보속’(補贖)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자칫 잠벌에 대한 보속 때문에 하느님을 계산적이고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면 벌을 주는 것도 자비의 방법이 됩니다.

다윗이 한번은 병적 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골리앗을 이기게 해주신 분이 하느님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군인이 몇 명이 되는지 계산해보겠다는 말은 이제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겠다는 교만의 죄가 됩니다.

다윗은 이 죄를 뉘우치고 병적 조사를 한 것을 후회합니다.(2사무 24장 참조) 하지만 하느님은 죄는 용서하시지만, 벌은 거두지 않으십니다. 벌을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삼 년의 기근, 원수에게 석 달 동안 쫓기는 것,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도는 것 중에 선택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짧은 것을 선택했고 그 전염병으로 장정 7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도 ‘그제야’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그전의 잘못을 뉘우친 것과 분명 다릅니다. 그는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2사무 24,17)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이 조금은 지나치다 여겼는지 자신은 아들에게 더욱 자비로운 자세를 취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동생 타마르를 능욕한 배다른 형제 암논을 살해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벌은 조금만 주고 자비롭게 압살롬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자신을 바로 용서하지 않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궁궐에서 나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2사무 13-15장 참조)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함으로써 더 큰 아픔을 겪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자비를 베푼 결과입니다. 누군가의 자비가 죄지은 사람이 깊이 뉘우칠 기회를 빼앗는다면 더 큰 죄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해도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시적인 벌”(1471), 곧 잠벌(暫罰)이 남습니다. 잠벌은 하느님께서 죄의 고통을 깨닫게 만들어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못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사자가 잠벌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대신 잠벌을 채워줄 사람도 필요합니다. 희생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의 죄 대신 7만 명의 군사가 죽었지만, 우리의 죄 대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죄의 크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희생하여 또 누군가의 잠벌을 사해주고 그래서 그 사람이 “불건전한 집착”(1472)에서 벗어나 “묵은 인간”에서 “새로운 인간”(1473)으로 태어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그 희생은 하늘에서 반드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공’(通功)이라 하는데, 나의 죄가 다른 이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나의 공로도 누군가에게 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1475 참조)

교회는 이런 성인들의 희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무한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피의 공로를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공로를 통해 잠벌을 사해주는 것을 ‘대사’(大赦, indulgentia)라 합니다. 교회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해서 쓰도록 ‘모든 잠벌을 사해주는 전대사(全大赦)’나 ‘부분적으로 사해주는 한대사(限大赦)’를 줍니다.(1479 참조) 하지만 이런 대사가 잠벌의 효과를 감소시키지 않게 또 다른 희생이나 봉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이런 봉헌이 ‘면죄부’란 오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나의 죄와 이웃의 죄를 위한 희생은 잠벌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위한 죄의 보속을 위해 희생을 봉헌함으로써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동참하고 그 공로의 나눔을 통해 교회 일치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며 잠벌을 남겨두시는 이유는 자신의 회개를 위해서건 나눔의 사랑실천을 위해서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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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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