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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7월 5일)

1821~1846년, 대한민국 출생 및 선종, 순교자, 최초의 한국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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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성인은 증조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앙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증조부 김진후 비오 복자와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성인은 16살 때 모방 신부에 의해 세례를 받고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조선인 성직자 양성 교육을 받기에는 국내에서 박해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떠난 유학길이지만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카오에서는 현지 신학생들이 민란을 일으켜 필리핀이나 마닐라로 피신해야 했고, 이런 와중에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최양업과 열심히 수학을 이어가던 성인은 종교자유가 없었던 조선을 전교하기 위해 파견된 세실 제독의 통역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탄 프랑스 함대는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항해를 중지했고 결국 성인은 혼자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신자의 순교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입국시도를 여러 번 실패한 그는 1844년 소팔가자에서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페레올 주교는 1년 뒤 성인이 사제품을 받을 수 있는 만 24세가 되자 그에게 사제품을 주었습니다. 첫 한국인 사제가 탄생한 겁니다. 그의 첫 미사 집전은 상해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횡당 신학교 성당에서 이뤄졌습니다.

성인은 충청도 나바위에 상륙해 국내 사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습니다. 성인은 “의주 방면은 경비가 엄하니 바닷길을 알아보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백령도 부근으로 가 중국 어선을 접촉했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하는 등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다 관헌에게 체포됐습니다. 성인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국내 신학생인 것이 알려지자 조정은 이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성인을 서울 포청으로 압송했습니다. 이곳에서 3개월 동안 무려 46차례의 문초를 받은 그는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1846년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였고, 나의 하느님을 위해서였다”며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평생을 하느님과 한국 교회를 사랑한 겁니다.

성인은 1925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고,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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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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