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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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지행합일(知行合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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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합일(知行合一). 앎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번역된다. 그런데 명나라 때 왕양명은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일치돼 있다’라고 풀이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은 ‘앎’은 참다운 앎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때 참다운 앎을 진지(眞知)라고도 하고 왕양명은 그것을 양지(良知)라고도 불렀다. 호랑이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과 멧돼지의 갈비뼈를 부서뜨릴 만큼 강한 이빨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그는 그저 신기해 할 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깊숙한 산중에서 호랑이를 한 번이라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오싹해지며 사지가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진정으로 호랑이를 아는 사람이다. 행동이 자연스럽게 함께한다.

문제는 윤리적인 앎은 우리들의 체험적인 앎처럼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누지 못한다. 양명의 관점에 의하면 결국 우리는 용서와 나눔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명의 답은 간단하다. 그럼에도 용서하고 나누라.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이미 해야 할 것을 알고 있지만 습관이나 나약함 때문에 행동을 미루거나 마음의 흡족함을 이유로 망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천하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 앎을 증거 한다.

왕양명이 지행합일을 말한 것은 결국 우리의 실천이 많은 지식이나 완벽한 앎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시 주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앎이 이뤄진 이후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종신토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양명은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것에 있어서 고도로 예민한 양지(良知)가 있으므로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선한 일을 할 자격이 되는지, 혹은 내 마음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여기에는 많은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조건들이 외적으로 다 갖춰진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완벽한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을 만난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줬으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마르 1,7; 루카 3,16)이라고 고백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제자들을 시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한다.

요한 세례자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확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무엇인가를 더 발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셨을 뿐이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마태 11,5)

그들이 ‘보고 들을’ 만한, 그래서 그들의 확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새로운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진 것을 이미 봤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것이란 결국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음성과 확신에 찬 신적인 인간의 모습뿐이었다. 말과 행위, 앎과 실천이 하나 된 하느님의 얼굴이다.

요한 세례자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데 있었지만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보다도 작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확신을 구하려는 의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하늘나라의 존재와 인간이 구분되는 분기점이다. 여전히 ‘알아야’ 더 잘 믿고 행할 수 있다는 나약한 인간의 두려움이 그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동시에 자선 주일이다. 우리의 나약함은 자선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혹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자선을 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나의 이 자선이 일시적인 동정심은 아닌가 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이유로 나눔과 베풂을 유보한다. 차라리 그것이 자신에게 더 솔직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이유들이 충족될 때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평생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 삼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믿음에 찬 실천을 시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이사 35,1)

물기 하나 없는 광야와 메마른 땅은 스스로 기뻐할 수 없으며 사막은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광야이며 메마른 땅이며 사막이다. 기뻐하거나 꽃을 피울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우선 기뻐하고 꽃을 피우라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행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의 신앙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고, 이 기다림은 메마른 우리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작은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천과 앎이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행이 지속되지 못할 수도, 그 이후에 다른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믿고, 희망해 실천하라. 기쁨과 꽃을 피우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대림(待臨).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란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척박함에 꽃을 피우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아닐까.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그동안 ‘말씀묵상’을 기고해 주신 서강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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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12-1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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