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5일
교구/주교회의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말씀묵상] 내 마음에 드는 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대체 그분은 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던 학부 3학년 무렵, 몸살처럼 제 안에 들어온 질문이었습니다. 오로지 고통의 길에 들어서려고 작심하신 듯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갖는 위태로움을 받아들이기 난감했고 그분에 대해 좌절감을 느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렇게 신학에 입문한지 30년이 넘은 지금에야 비로소 그 위험해보이던 예수님 일생은, 모멸이나 굴욕, 실패가 결코 ‘패배’의 동의어가 아님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는 기쁜 소식임을 깨닫고, 그 어처구니 없는 사랑에도 조금씩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죄인들 틈에 끼어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죄인들 틈에 끼어 십자가형을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마치신 예수님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도 패배시키지 못했던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지 그분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이 드는 아들”(마태 3,17) 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 라고 장엄히 선포합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유사한 주제가 지속됩니다. 동방에서부터 빛나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박사들처럼(마태 2,1-2)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이 있는 요르단 강으로 몸소 오시는 여정을 감행하십니다. 두 사건 모두 긴 여행과 이를 통한 ‘공적 드러남’(公顯, Epiphany)이라는 주제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30년간의 숨은 생활과 침묵을 뒤로 하고 이제 공개적인 생활의 시작과 그 결단을 알리는 공적인 드러남, 즉 두 번째 ‘공현’이었던 것입니다.


■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사건은 요르단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요한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마태오복음서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며 당혹스러워하는 요한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요한의 이러한 주저함에 예수님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선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는 예수님은, 물속까지 내려가는 행위를 통해 죄인들을 위한 구원사업에 돌입하시고, 공생활의 마지막에도 역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땅 속 깊이까지 내려가심으로써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이룩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이루어야 할 모든 의로움’이신 것이고, 따라서 공생활 시작인 세례 때 언급된 ‘의로움을 이룸’은 공생활 마지막에 ‘이루실 의로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구원 사업의 시작을 알리신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직접적으로 소통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17절)을 ‘보게’ 되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라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듣는 일이 발생하면서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 것인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죄를 없애시고 의로움을 이루신 예수님은 진정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존재이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내 마음에 드는 나의 종

회개와 정화가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그 여느 인간과도 달리 여기지 않으시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1독서에서 제시된 ‘주님의 종’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독서의 내용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부각시키며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며 붙들어 주시기에(이사 42,1) 종은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자기 생명과 삶 전체로 주님의 뜻을 증언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나의 종”으로 불린 이들은 아브라함(창세 26,24), 모세(민수 12,7), 칼렙(민수 14,24), 다윗(2사무 7,5), 욥(욥 1,8)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느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 “나의 영”을 주시는데 이점이야 말로 ‘종’이 가진 권위 중 가장 분명하고 탁월한 권위였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면밀히 계획하시고 선택하셨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분

제2독서의 베드로의 연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분이시기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종’으로 묘사된 이는(제1독서) 이제 ‘아들’로 묘사되고(복음) 그분이 모든 이들의 ‘주님’이라고(제2독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다’라는 표현을 검색해보니 ‘어떤 것이 마음 안으로 들어옴’ ‘그것이 흡족하고 기쁘며 좋게 여겨진다는 의미’라는 해설이 나옵니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나의 영역을 넘어 타자에게 들어가는 초월(超越)의 행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안에 안주하며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랑은 도무지 확장될 수도 소통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초월의 의지를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이러한 예수님의 의로움은 이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또 하나의 초월이 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때로는 위험하고 위태롭기도 한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시며 자신을 진정한 의로움과 진리로 ‘공현’하시고, 그분만이 이룩하실 수 있는 경이로운 구원의 역사를 쓰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곧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1-07 등록

관련뉴스

말씀사탕2020. 1. 25

시편 31장 17절
당신 얼굴을 당신 종 위에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사목지침서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인터넷 굿뉴스. [전화번호보기]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