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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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고통이 가라앉자 구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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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내내 포스트잇에 써서 기도서에 붙여놓고 보았던 구절이 있습니다. “밭은 기침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이해인 수녀님의 ‘촛불 켜는 아침’이라는 시의 첫 구절입니다. 콜록 콜록 사투를 벌이며 아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모아 봉헌한 사순절이었고 그 막바지인 성지주일에 와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완성된 ‘성주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은 배신과 음모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첫 번째 인물로 나타나 수석 사제들과 은밀히 협상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긴 죽음의 여정이 끝난 결말 부분에도 악인들의 공모가 언급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가서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기로 공모합니다.(27,62-64) 이처럼 고통과 음모, 배신으로 가득 찬 수난의 이야기를 마태오복음서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이끌어 나갑니다. 단순히 사건을 시간상으로 배열하는 데에 집중하기보다 이 죽음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고된 내용에 얼마나 충실히 부합하는지를 거의 매 구절마다 확인합니다.(26,24.31.53-54.56; 27,9-10 등) 심지어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상의 절규도, 해면을 가져와 신포도주에 적셔 목을 축인 것도 모두 시편 22,2과 69,22의 실현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냅니다.


■ 배신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주제는 ‘배신’입니다. ①유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고발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돈 때문에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의심과 자기식의 판단이 문제였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유다의 배신 직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와 그때 생긴 갈등을 묘사합니다.(26,6-23)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문학적 복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큰 무리를 대동하고 다가왔을 때 그를 “친구”로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26,50) ②베드로와 제자들: 겟세마니의 처절함 속에서도 마냥 잠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26,40)고 호소하지만, 이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어이없는 태도를 그냥 놔두십니다.(26,44) 잠시 뒤 결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다.”(26,56) 베드로는 그래도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26,58) 하지만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26,70.72.74)라고 부인한 후 닭이 울자 비참함에 슬피 웁니다.(26,75) 이후 베드로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③빌라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의인’이며 ‘무죄한 사람’으로 고백한 사람이 있는데 빌라도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꿈 내용을 전하며 충고하고(27,19)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게 되지만 군중의 위협 때문에 사형을 선고합니다. 불의에 휘말려 정의를 배신한 것입니다. ④군중들: 빌라도가 판결을 주저하자 유다인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지겠습니다.”(27,24-25) 하며 단호히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불과 며칠 전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21,9)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호했던 이들이 그토록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와 가벼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 자발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다

이 모든 배신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27,14) 제2독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데, 모욕과 배신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십니다.(필리 2,6-8)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시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 ‘종의 모습’을 지니시고 ‘사람들과 같아’ 지셨다는 극명한 대조를 통해 그분의 자발적 낮아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이런 낮아짐이야말로 하느님이 일하시는 절대적인 조건이 됨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발적 희생과 내어줌으로 낮아지신 분에게 당신 말씀을 직접 듣고 전할 수 있는 혀와 귀를 주시고 “아침마다 일깨워”(이사 50,4) 주셔서 모든 고통과 모독을 감내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뒷걸음치지도 위축되지도 않는데,(50,5-6) 현재가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선택하고 그렇게 낮은 자리에 조용히 침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올라오는 구원의 맨얼굴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는 동안 많은 계획들이 취소되고 일상이 고요히 가라앉자 떠오른 삶의 진실들이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 중 뜻밖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모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지킨 것이 사랑이었는지, 혹시 피로와 분노, 혐오로 비뚤어진 일상은 아니었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삶과 구체적 소명은 외면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외롭게 하면서 미안한 일만 더 많이 만든 삶은 아니었는지…. 어쩌면 바이러스만큼이나 무서운 치사율을 갖고 있던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화시키며 조정한 경쟁과 탐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지침은 2미터라는 물리적 간격을 요구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정녕 지키고 사랑해야할 소중한 대상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가까이가게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계획하고 질주해야할 때가 아니라 사랑하고 토닥이며 생명의 꽃을 피울 때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 봄이잖아요.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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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3-31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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