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교구/주교회의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60년전 피란길 도보순례 나선 황인국 몬시뇰

“험난했던 피란길 어제일처럼 생생”, 평화통일 기도 벗 삼아 묵상하며 떠난 순례, 박해 피해 내려와 성당에서 살며 성소 키워, 북한 회개·교회 재건 기도에 힘써줄 것 당부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어젯밤 일처럼 생생하다. 바라보는 것조차 몸서리쳐질 만큼 차가웠던 대동강물을 헤엄쳐 나온 후에도 쉴새없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뎌내야 했다. 온종일 걷다 지쳐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1950년 12월 4일, 살기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평양을 떠났다. 자유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길은 대전 대흥동성당 마당에 발을 디딜 때까지 50여 일간 이어졌다.

통일이 되면 평양에서부터 대전까지 이동했던 피란길을 꼭 다시 한 번 걸어보리라 다짐했었다. 무엇보다 매순간 죽음의 고비를 넘겨 살게 하고 사제로 세운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싶었다.

황인국 몬시뇰(평양교구장 대리·서울대교구 수도회 담당 교구장 대리)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은 지난해 12월 4일 임진각을 출발했다. 이어 1월 22일, 꼭 60년 만에 대흥동성당에 다시 도착, 오기선 요셉 장학회 회원들 및 동창들과 뜻 깊은 미사를 봉헌했다. 감사의 기도와 함께 평화통일과 북한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벗 삼아 묵상한 여정이었다.

# 임진각에서 대전까지

 
▲ 황인국 몬시뇰이 대흥동성당에 도착하기전 인근 선화동성당을 둘러보고 있다.
 
출발지로는 임진각을 선택했다. 평양은 고사하고, 연평도 포격사건 여파로 도라산까지도 들어갈 수 없었다. 60년 전 걸었던 피란길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피란일정을 기록해둔 노트도 큰 역할을 했다. 수많은 지인들과 신자들이 함께 걷고 싶어했지만, 묵상을 위해 혼자 순례를 시작했다.

일산과 서울, 천안, 공주, 온양, 유성 등을 거쳐 대전에 들어섰다. 누구랄 것 없이 곤궁함을 겪었던 전쟁통에 따뜻한 이웃사랑을 보여줬던 이들의 집터에 잠시 머무르자 코끝이 찡해졌다. 겨울 피란길에 꽁꽁 언 황 몬시뇰의 가족들에게 뜨끈한 아랫방을 내어주고,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냉골 같은 윗방에서 자던 이들이었다. 당시 집주인이 이른 새벽, 왕복 십리길이 넘는 시장에 가서 사온 선지로 끓여준 국은 평생 잊지 못한 따스한 배려였다.

대전 시내에 들어서자 마치 어제 일처럼 주변 상황이 떠올랐다.

“당시엔 폭격으로 굴뚝만 남은 집들과 폐허들밖에 없었는데…. 그때 유일하게 부서지지 않았던 건물은 나중에 시청으로도 쓰였었지….”

# 죽을 고비 수차례 넘기며

시작은 이랬다.

1950년, 15살 꿈 많았던 소년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피란을 떠나야 한다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황 몬시뇰의 가족들은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신앙을 받아들여 신앙의 모범을 보여왔다. 덕분에 황 몬시뇰도 어릴 때부터 주교님과 부주교님 숙소를 오가며 심부름을 도맡아하던 기억이 선하다.

하지만 1949년, 북한지역을 장악한 공산정권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박해들을 이어갔다. 1949년 5월 한 달 동안에만 주교 2명이 납치됐고, 북한에서 사목하던 신부들은 하나둘씩 계속 끌려가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됐다. 평양주교좌본당에도 비상이 걸렸다. 딱 한 명 남은 보좌신부를 지키고자 본당 청·장년들이 돌아가면서 사제관 불침번을 섰다. 황 몬시뇰의 아버지도 그 장년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인민군들은 한국전쟁 발발후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주민 2000여 명을 집단살해하고 후퇴했다. 황 몬시뇰의 아버지는 집단살해 현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했고,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죽기보다 싫은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야했지만, 오로지 기도로 버텼다. 허허벌판에서 밤을 새고, 수숫대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자고, 가랑잎 더미 속에서 벌벌 떨었다. 인민군에게 잡힐듯 잡힐듯하며 살아남은 상황도 수차례 겪었다. 얼어 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고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선 것은 그야말로 섭리였다.

지금부터 꼭 60년 전인 1951년 1월 22일 황 몬시뇰의 가족들은 대전 대흥동성당에 들어섰다. 황 몬시뇰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14년간을 이곳 성당 마당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성소의 꿈을 키우고 수품 후 첫 미사도 봉헌했다. 그러한 성당에서 60년만에 봉헌하는 미사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했다.

# 통일사목에 대한 준비


 
▲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은 지난해 12월 4일 자신이 걸었던 피란길을 되짚으며 임진각에서 대전 대흥동성당까지 도보순례를 한 황인국 몬시뇰.
그는 “젊은 세대들이 북한의 실상과 북한교회 현실에 대해 올바로 알고, 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해를 피해, 총칼을 피해 남쪽으로 피란 왔던 옛 평양교구 소속 사제 20여 명 대부분은 현재 원로사목자가 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북한선교에 뜻을 두고 있는 사제 외에도 현재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 10명이 양성과정에 있다. 통일사목을 담당할 예비사제들이다. 황 몬시뇰은 평양교구장 대리로서 이들을 양성하는 큰 구심점으로 서 있다. 황 몬시뇰은 특히 신학생들과의 만남 시간 때마다 선배 사제들의 순교와 박해 모습에 대해



가톨릭신문  2011-01-3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7

지혜 1장 6절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