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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 <24>평양교구 비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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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현`이라는 지명은 생소하겠지만, 용천은 아마도 익숙할 듯합니다. 2004년 용천역 폭발 사고가 일어났던 바로 그 지역입니다.

 신의주시 남단 용천군과 맞붙어 있는 평북 의주군 비현면에 평양교구 비현성당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경의선 종착역인 신의주역에 한 시간쯤 못미처 있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였지요.

 1930년 적벽돌로 지은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기까지 20년간 한옥성당이 비현본당 공동체의 터전이었습니다. 1911년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당시 평북 용천군 양광면 산대동(훗날 평북 의주군 비현면 산대동)에 기와집 20여 칸과 부지 6600여㎡(2000여 평)를 마련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윤근 신부를 파견하면서 비롯됐지요. 그림을 보면 긴 전통 한옥이 보이고 그 앞에 종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종탑이 한옥 지붕에 올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한옥 성당은 규모가 작아 마당에 따로 가설 구조물을 쌓아 종탑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비롯된 비현성당은 평북 의주군 남동 지역과 용천군 동부 지역, 선천군 남면 일대를 관할했고, 후일 비현면 체마동에 새 성당을 지은 지 5년쯤 지난 1935년 무렵이면 본당 신자 3000여 명에 남녀 전교사 10여 명, 공소 공동체 20곳이나 될 정도로 큰 본당 공동체가 됩니다. 1936년 인근에 운향시본당을 분가하면서 공동체는 1500여 명으로 줄어들지만, 비현본당은 해가 갈수록 그 열성과 전교가 깊이를 더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활력이 넘치던 공동체도 해방 이후 공산화와 전쟁으로 무너집니다. 6ㆍ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9대 주임 김동철 신부가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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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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