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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 <27>평양교구 영유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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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트막한 언덕 위에 그림같이 예쁜 고딕식 연와조 성당이 우뚝 서 있고, 초가집이 드문드문 보이는 동네는 한가롭다. 꾸불꾸불한 동네 샛길을 따라 오르면 서양식으로 지어진 수녀원이 나온다.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현 평원면) 이화리에 성당이 세워진 건 1925년의 일이다. 경의선 어파역에서 서북부로 6㎞ 가량 떨어진 영유읍내로, 1924년 7월 공사에 들어가 중국인 인부 50여 명을 동원, 1년 만에 공사가 마무리됐다. 낙성식 겸 축복식은 이듬해인 1926년 1월에 개최하려 했으나 그해 1월 말 경성대목구(현 서울대교구) 보좌 드브레(Emile Alerandre Joseph Devred, 유세준) 주교가 선종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승하까지 겹치는 바람에 지연되다
가 그해 5월 메리놀외방전교회 총장 월쉬 신부가 내한하면서 축복식을 갖는다.

 성 파트리치오를 수호 성인으로 한 영유성당은 성당뿐 아니라 사제관, 영청 학교 등이 두루 갖춰져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파견되면 우리말과 풍습, 문화를 익히는 도량이 됐다. 1925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면(요한, 1899~1966) 전 총리도 영유본당 부설 학교에서 수업을 맡았고, 평양교구 설정과 관련해 재단 사무를 도왔다.

 영유성당엔 또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로 썼던 수녀원이 지어져 1926년 일고여덟 명의 회원들이 상주하며 전교활동과 함께 고아원, 시약소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빈민 구제에도 힘썼다. 메리놀수녀회는 특히 영유성당에 당시로서는 평양교구 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여자기예학교를 신설, 12세부터 19세까지 여학생 50명을 모집해 교육했다. 교과목은 자수와 교리, 조선어, 일본어, 산수 등으로, 수업료는 전원 면제됐고 학생들이 수를 놓아 생긴 수익금은 모두 학생들에게 돌려줄 정도로 혜택이 컸다.

 1895년 `영유의 사도` 조상순(로베르토)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돼 1902년 본당으로 설정되고 1937년이 되면 신자 수만 1500여 명에 이르는 큰 공동체로 성장한 영유본당은 아름다운 복음화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1945년 공산화 이후 박해 속에서 쇠락하다 1949년 12월 11일 15대 주임 홍도근 신부가 북측 내무서원에 연행돼 수난의 길을 걷게 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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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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