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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 <29>평양교구 신의주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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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25일 정전 60주년을 맞아 봉헌한 파주 `참회와 속죄의 대성당`과 닮아 혼동할지 모르지만, 그림은 평양교구 신의주성당이다. 정확히는 `신의주 진사동성당`이다. 1939~42년 마전동본당이 분가, 진사동본당으로 본당 이름을 일시 바꿨던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22~49년까지 마전동본당 분가 기간인 4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신의주성당으로 불렸기에 신의주성당으로 불러도 큰 무리는 없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성당 외양을 이 신의주성당을 그대로 본따 지었다.

 1922년에 짓고 1930년에 중건한 신의주성당은 평양교구에서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했다. 한ㆍ양 절충식 성당인 신의주성당은 반지하, 지상 1층에 한식 기와와 목구조, 일부 서양식 외장과 벽돌을 써서 벽돌조 중층 구조로 지었다. 그 외관이나 전체적 형태, 맵시, 미감 등이 빼어나 20세기 초 평양교구의 대표적 교회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다. `성당 토착화`의 모범적 사례 중 하나로도 꼽힌다.

 1912년 인천에서 신의주로 이주한 `신의주 사도` 김 쿠네군다를 뿌리로 형성된 신의주본당 공동체는 성당 건물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활발한 선교와 사목, 구호사업, 야학을 통한 문맹 퇴치로도 유명했다. 1936년에는 신의주성모병원을 신축해 의료 사목도 펼쳤다. 특히 의학박사 출신 메리놀수녀회원 힐슈벡 멜시(Hirschboeck Meercy) 수녀의 뛰어난 의술과 자애스러운 치료는 많은 이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덕택에 신의주본당은 1936년 부활시기에 새 영세자 200여 명, 견진자 300여 명이나 낸다. 1937년에는 본당 신자가 1303명, 공소(4곳) 신자 313명으로 모두 1616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의주본당 역시 1949년 12월 10일 밤 8대 주임 홍건항 신부가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 행방불명돼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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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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