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교구/주교회의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선교지에서 온 편지] 필리핀(5) 5만원권의 숨겨진 가치를 아시나요 - 박찬인 신부(대전교구)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의 교차점에서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필리핀에 사는 가난한 학생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학업을 중단한다.
사진은 학교에서 봉헌한 미사에 참례한 학생들.
 
 
  제가 현지인 사목을 하고 있는 마닐라 말라떼본당의 관할 구역은 9개인데, 그중 4개 구역이 도시 빈민지역입니다. 말라떼본당에서 빈민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어서 사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 관련 사례들을 접하곤 합니다. 다양한 사연들 중 저 스스로를 부끄럽게 했던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말라떼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본당 봉사자가 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노숙을 하는 한 가정에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집안 형편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달 5만 원이면 그 아이가 계속 공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봉사자는 제게 그 여학생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자금을 후원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는 무상교육을 하는 공립중학교였지만 과외활동 및 여러 가지 이유로 필요한 비용이 많다 보니 가난한 형편에 있는 아이들이 쉽게 학업을 중단하는 실정입니다.

 그 사연을 듣고 며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그런 형편의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 학생에게만 학자금을 후원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하나씩 시작하는 마음으로 여학생 가정에 관해 몇 가지 확인을 거친 후 도와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부모님을 만나 동의를 구하고 여학생을 만나 정말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봉사자와 그 집을 방문했지만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물으니 딸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다른 노숙자가정 아이들처럼 길거리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팔거나 구걸을 하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학생이 있다는 거리로 찾아 갔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참 똑똑하고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아이에게 지금 하는 일을 중단하고, 공부에만 전념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고 개인적으로 학자금을 후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두 달 가량 지났을까요? 병자영성체 때문에 빈민지역을 방문하던 중 길거리에서 낯익은 앳된 여학생이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제가 후원하는 여학생이더군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앞으로 다가가 짧은 영어로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아마도 홧김에 여학생에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제 감정만을 드러냈던 것 같습니다. 그 여학생은 가만히 서서 제 말을 듣고 있다가 별다른 변명 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내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며칠 후 여학생의 부모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그 아이가 다시 구걸을 하게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학교에 갔는데 자신만 교복을 입지 않고 있어 선생님이 "다음 날까지 교복을 마련해 입고 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바로 교복을 구입하기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제게 교복까지 사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면목이 없어서 스스로 교복값을 벌기 위해 거리로 다시 나가게 됐다는 사연이었습니다.

 부모님 얘기를 듣고 저는 한참 동안 멍하니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나 미안하고 부끄럽던지…. 그 다음날 아이를 불러 먼저 이유도 묻지 않고 꾸짖은 일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옷가게에 가서 교복을 사주고, 맛있는 점심도 먹으며 제가 저지른 실수를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나가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여학생은 다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실수를 교훈삼아 아이에게 왜 또 구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물었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학교를 다니면서 부족한 것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가버렸습니다.

 며칠 후 또다시 부모님이 성당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들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습니다. 케이크를 건네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습니다. 딸아이가 제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방법을 찾고 있던 중 제 생일을 사회복지사에게 물었고, 생일케이크를 선물하려고 또다시 구걸을 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케이크를 손에 든 저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한편으론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언어도 피부색도 다른 민족이지만, 더욱이 어렵고 힘들지만 배려하고 감사할 줄 아는 여학생의 마음을 보면서 작은 것에도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고 연약한 그 아이를 통해 제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셨고, 제가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받아 왔지만 정말 감사드리며 살아왔는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후원 시티은행 108-16147-267-01  예금주 박찬인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12-1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3

마태 5장 7절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