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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학 신부, 김천 지역 복음화 기반 닦다

[공소(公所)[ 23. 대구대교구 신룡본당 개령·감문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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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신룡본당 감문공소는 1972년 독일인들의 성금으로 지은 공소다.
 
대구대교구 신룡본당 감문공소는 1972년 독일인들의 성금으로 지은 공소다.


1901년 김천 지역 복음화의 발판 놓아

경북 김천시 개령면 일대에는 1961년 신룡공소를 시작으로 1962년 개령공소, 1970년 감문공소가 잇따라 설립된다. 이들 세 공소는 2000년 11월 24일 신룡본당으로 통합 신설됐다. 하지만 개령과 감문공소는 본당 사목구 관할 구역으로 편입됐지만, 여전히 공소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김천 개령면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된 해는 1901년이다. 그해 5월 제2대 가실본당 주임이던 김성학(알렉시오, 1870~1938) 신부가 김천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김천 황금동 자라밭골 초가 1동을 매입해 김천 지역 복음화의 발판으로 삼았다. 때마침 1899년 상주목사 이한응이 일으킨 ‘교안’(敎案)을 피해 그해 상주에서 김천 개령면으로 이주해온 교우 최석영(요한)이 신룡리 392번지 자신의 집 사랑채에 김 신부를 초대해 미사를 봉헌하면서 개령면 일대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교안은 종교와 관련된 분쟁이나 사건, 재판 안건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중국이나 한국에서의 서양 종교에 대한 반대 투쟁을 지칭한다. 상주 교안은 가톨릭 선교가 활발하던 상주에 부임한 목사 이한응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주민들의 천주교 입교를 방해한 사건이다. 이한응이 관할 지역 내 모든 교우의 명단을 요구하고, 예비신자들에게 입교하면 관장이 처벌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김성학 신부는 이 일을 뮈텔 주교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이 교안은 상주목사가 교체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신룡본당 감문공소 내부. 합판 천장과 마룻바닥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김성학 신부는 1870년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 구교우 가정에서 출생했다. 1883년 신학생으로 선발돼 4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에서 유학 중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흥골에 예수성심신학교가 개교함에 따라, 1892년 귀국해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는 1897년 뮈텔 주교로부터 서울 약현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제2대 가실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김 신부는 1901년 김천본당 초대 주임으로 10년간 사목하면서 김천 지역 복음화의 기반을 닦았다. 1911년 4월 8일 대구대목구가 분할되자 경성대목구 황해도 장연본당 주임으로 전임한 그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라틴어 교수, 평양ㆍ공세리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다 1938년 9월 뇌출혈로 선종, 공세리본당 묘지에 안장됐다.

김성학 신부는 특별히 ‘김천 선교’에 관심이 컸다. “현재나 미래 전망으로 보아 신부가 상주해야 할 곳으로는 제 관할구역 신자뿐 아니라 대구 신자들까지도 모두 김산군에 있는 금천(김천)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천거합니다. …이 장소는 대구에서 110리 거리입니다. 대구에서 약간 멀다고 느껴지겠지만 제 판단으로는 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느껴집니다. 고산까지는 200리, 공주까지는 200여 리나 되는 곳도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 신자들이 분포되어 있는 중간 지점에 있고, 한 공소는 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황간 지역에 있는 두 큰 공소도 30리 정도이고, 여타 공소도 50~60리밖에 되지 않습니다.”(김성학 신부가 1898년 7월 12일 가실에서 뮈텔 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불교도 김치준, 가톨릭 진실성 깨닫고 입교

김성학 신부가 김천으로 부임할 당시 개령현 곰내기(현 김천시 개령면 신룡동)에 김치준이라는 불교 신자가 살고 있었다. 불학(佛學)을 가르친 그는 1000여 명의 제자를 두고 있었다. 불교에 열심하고 경건했던 그의 가족 모두는 12년간 일체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어느 날 김치준이 가톨릭에 관해 알고 싶다며 김천에 사는 권종응(베드로) 전교회장을 찾아왔다. 권 회장은 그에게 가톨릭 주요 교리를 알려줬다. 집으로 돌아간 김치준은 제자 한 명에게 미신 행위를 지시하고 자신은 그 옆에서 권 회장에게 받은 기도서로 12단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전에 늘 일어났던 신기한 일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가톨릭 신앙의 진실성을 깨달은 그는 미신 행위에 사용하던 모든 집기를 부숴버리고 권 회장에게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권 회장과 김천 교우들을 초청한 김치준은 자신이 이단을 끊어버린다는 표시로 함께 개를 잡아먹으며 잔치를 벌였다.(「가실성당 100년사」 106~107쪽 참조) 김천과 개령면 일대 선교는 이렇게 극적으로 전파됐다.



개령·감문공소 모두 알빈 신부가 설계

개령과 감문은 모두 알빈 신부가 설계한 공소다. 김천시 문화로 12에 자리한 감문공소는 김천 황금본당 제12대 주임으로 1970년에 부임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스테파노 라스터(한국명 나현승) 신부가 설립했다. 라스터 신부는 독일의 은인들과 친지들의 도움으로 건축 기금을 모금해 1972년 6월 18일 감문공소를 건립했다. 건평 25평(82.6㎡)에 대지 108평(357㎡)의 아담한 감문공소는 양옆으로 가정집에 둘러싸여 있지만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마룻바닥과 합판 천장이 공소의 세월을 느끼게 한다. 제단 벽은 벽돌을 새로 쌓아 옛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제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긴장감을 뒀다. 한때 감문공소 교우수가 120여 명이 될 정도였으나, 본당으로 편입된 다음부터는 신룡성당 미사에 참여해 교우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김천시 동부길 113-7에 자리한 개령공소는 건평 73평(241.3㎡), 대지 291평(961.9㎡) 규모로 1962년 9월 14일 건립됐다. 공소 내부는 감문공소와 흡사하다. 따라서 감문공소 제단의 옛 모습은 개령공소에서 추억할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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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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