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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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설립된 유서 깊은 교우촌 공소

[공소(公所)] 26.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금대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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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풍수원본당 금대공소는 본당 관할 4개 공소 가운데 가장 큰 공소이다. 금대공소 외경은 ‘동화 속 풍경같이 예쁘다’고 감탄할 만큼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금대공소는 본당 관할 4개 공소 가운데 가장 큰 공소이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금대남4길 21에 자리한 금대공소는 1900년 10월 28일에 설립된 유서 깊은 교우촌 공소이다.

금대리(琴垈里)는 조선 말기까지 원주목 고모곡면에 속했다가 1895년 횡성군에 편입됐는데, 옛사람들은 이 마을을 ‘검두’, ‘검대’라고 불렀다. 금대리는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에 이르는 6번 일반국도를 타고 서원면 유현리 복지골 삼거리에서 409번 지방도로 갈아타 오상동 끝자락에 있는 자연부락이다. 금대리는 윗마을 돌자골과 아랫마을 검두로 나뉘는데 공소는 검두에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전으로 생활하는 주민이 많아 큰 마을을 이루었으나, 1966년 화전 정리법이 제정되면서 화전민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쇠락했다. 하지만 금대리는 일찍부터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교우일 만큼 지금까지도 교우촌의 명맥을 잇고 있다. 금대공소는 원주교구 박순신ㆍ김영진ㆍ김태진ㆍ박호영 신부와 여러 수도자를 배출할 만큼 신심 깊은 성소 못자리이기도 하다.

 

 

금대공소는 성체 신심이 깊은 풍수원본당의 전통에 따라 성체를 모신 감실이 있다. 공소 내부 흰색 벽과 색유리창, 나무 마룻바닥이 마치 어머니 품 마냥 평안함을 준다.

 


1880년 박해 피해 온 세 가족 공동체 이뤄

금대리교우촌은 1880년께 박씨, 정씨, 조씨 등 세 가족이 박해를 피해 처음으로 이주해 살았고, 이후 신씨를 비롯한 교우들이 숨어들어와 살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한다. 1899년~1900년 교세 통계에 금대공소 교우 수는 49명으로 집계돼 있다. 금대공소는 뮈텔 주교가 사목 방문할 만큼 초기부터 활발하고 규모 있는 신앙 공동체였다.

금대공소가 언제 설립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 책자와 자료에서 금대공소 설립일을 1900년 10월 28일이라 하는 까닭은 ‘금대공소’라고 적힌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날짜가 이날이기 때문이다. “60리 떨어진 물구비(홍천)공소로 떠났다. 산 하나를 넘어서 8일 후에는 다시 검두(금대)공소로 와야 한다. 풍수원 교우들과 정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길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물굽이에는 7~8가구가 있는데, 절반은 옹기장이들이고, 절반은 농부들이다.”(뮈텔 주교 일기, 1900년 10월 28일 자) 1896년 8월 7일 제2대 풍수원본당 주임 정규하 신부가 인수한 공소 명단에는 오상골만 있고, 1900년 10월에 뮈텔 주교가 검두공소를 방문한 것으로 보아 금대공소는 1896년 8월에서 1900년 10월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규하 신부는 성당을 중심으로 횡성군 서원면을 가톨릭 교우촌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정 신부는 이 일이 실현되기 위해선 30리(약 12㎞) 간격으로 공소를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느루개(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느릅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지인들은 ‘느르개’라고 부른다)라는 아주 가까운 마을에 255마지기나 되는 큰 논이 있는데 신자들은 그것을 사고 싶어 합니다.…저 역시 주교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그 땅의 일부분만이라도 사고 싶습니다. 그 마을은 세 공소, 즉 검두(금대), 마을 전체가 교우인 오상골, 대부분이 교우인 이목정(배나무정)의 가운데 있습니다. 그중 느루개만이 전부 외인촌이어서 이곳을 매입하면, 3레우카(30리) 간격의 여섯 마을 모두가 교우가 될 것입니다. 이 여섯 마을의 이름은 수구대, 풍수원, 느루개, 이목정, 오상골, 검두인데, 이 마을 중 느루개가 중심에 있습니다.”(정규하 신부가 1902년 12월 29일자로 뮈텔 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1920년대 초반 공소에 서당과 교리반 운영

금대공소 교우 대부분은 가난에 찌들어 자녀들에게 학교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없었지만, 교육열은 대단했다. 그래서 1920년대 초반부터 공소에 아이들을 위한 서당을 운영할 뿐 아니라 신앙 교육을 위해 교리반을 운영했다. “횡성 검두공소에 소년들을 위한 조그마한 학교 하나가 있지만, 숫자가 적어서 10명 정도입니다.”(1922~1923 연례 보고서에서)

“횡성 검두공소 교우들은 가난을 핑계로 보통 자녀 교육을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공소에도 그런 악습이 퍼져, 낼 돈이 없다고 하면서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중고) 기금을 마련하려고도 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 공소에는 기도와 교리를 위해서 소년 교실 하나, 소녀 교실 하나씩을 세웠습니다.”(1924 연례 보고서에서)

“검두에는 서당이 하나 있는데 10명의 소년이 모두 교우입니다. 젊은이들은 선교에 매우 힘쓰고 있습니다.”(1926~1927 연례 보고서에서)

이처럼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금대공소 교우들은 아예 정규하 신부에게 공소에 상주할 사제 한 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정규하 신부가 설립한 동정녀 모임 ‘안나회’에 금대공소 교우 4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1950년에 공소 ‘성모회’를 발족해 활동했다.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의 성모자상 모자이크와 “환영합니다”라는 표지석이 공소를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1998년 동화 속 풍경같이 예쁜 공소 축복

초기 공소 건물은 6ㆍ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1952년 새 공소를 지어 사용하다 1998년 지금의 공소 건물을 축복했다. 금대공소는 널따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예수성심상과 공소 이름과 ‘환영합니다’라는 글이 새겨진 표지석이 공소를 찾은 이들을 맞이한다. 공소는 붉은벽돌로 지어졌고, 입구 양옆에 성모상과 성가정상이 놓여있다. ‘동화 속 풍경같이 예쁘다’고 감탄할 만큼 공소 외경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공소 내부는 단아하다. 흰색 벽과 색유리창, 나무 마룻바닥이 마치 어머니 품 마냥 평안함을 준다.

무엇보다 금대공소는 성체 신심이 깊은 풍수원본당의 전통에 따라 성체를 모신 감실이 있다. 이 감실 앞에서 매일 금대공소 교우들은 성체 조배를 하며 옛 선조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가톨릭 신앙을 삶의 근본으로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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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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