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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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부터 교우촌 이룬 신앙 공동체

[공소(公所)] 27.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오상골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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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오상골공소는 지금 남아 있는 풍수원본당 관할 공소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공소이다. 오상골공소는 1892년 이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원주교구 오상골공소는 지금 남아 있는 풍수원본당 관할 공소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공소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서원로 995-7에 자리한 오상골공소는 1846년 병오박해를 피해 횡성 둔내 황우우곡(현천리 황우촌)에서 김영록(실베스테르) 가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 점차 교우촌을 이룬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김영록 일가는 원래 경상도 예천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설연(안토니오)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모든 전답을 버리고 고향 예천을 떠나 제천 꽃댕이(화당리), 영월 새내를 거쳐, 강원도 횡성 둔내 황우우곡에 정착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병오박해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큰아들 김영록을 골짜기 너머 오상골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 때 평창 산너미 마을에서 교우 이종성 가족이 오상골로 피난 오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원주교구 김영진ㆍ김태진 신부가 김영록의 후손이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베드로)이 서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 김범우, 이존창,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조선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후 채 20년이 안 된 1800년에 세례를 받은 교우 수가 1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1801년 조선 조정의 첫 공식 박해인 신유박해로 조선 교회는 와해됐다. 하지만 조선 교회는 이른 시일 안에 교우 수 1만 명을 회복했으나 1839년 기해박해로 또 한 번 뿌리째 뽑힌다.
 

오상골공소는 한식 목조 건물 형태의 장방형 건축물로 외부는 벽돌과 황토, 나무 기둥으로 치장돼 있고, 내부는 서까래와 용마루가 노출돼 있다.


조선 왕조 박해 시기 강원도 교회의 중심지

강원도에 천주교 교우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시기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이다. 1802년 복자 신태보(베드로)가 순교자 유족 5세대 40여 명을 이끌고 풍수원으로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물론, 신유박해 이전 강원도에 천주교 교우가 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이 1791년 신해박해를 겪은 후 일가를 이끌고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아무튼, 초기 교우들이 강원도로 이주한 것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깊은 산이 많은 강원도는 교우들의 피난처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인 복자 김강이(시몬)는 박해를 피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강원도 울진에 정착했었고, 하느님의 종 권성여(프란치스코) 순교자도 박해를 미리 피하려고 1837년 강원도로 이사했다.

강원도는 1850년부터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였다. 당시 강원도 교우들의 80 이상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와 인접한 춘천, 홍천, 횡성, 원주, 평창 등지에 거주했다. 그중 횡성과 원주에 70가 가까운 교우들이 거주했다. 횡성과 원주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강원도 교회의 중심지였다. 특히 횡성은 강원도 지역에서 교세가 가장 성했고, 풍수원본당이 있는 서원면 중심으로 선교 활동이 왕성했다. 「포도청등록」에 따르면 1830년대에 횡성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고, 심능석의 경우 1838년 횡성의 자기 집에서 샤스탕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강릉으로 이주해 복음을 전했다.
 

1846년 병오박해를 피해 김영록 가족이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 교우촌을 이룬 오상골공소는 1928년부터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 신자들은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풍수원본당 관할 공소 중 가장 먼저 생겨

1888년 풍수원본당이 설립된 후 관할 구역 내 39개 교우촌이 공소로 편입됐다. 초대 주임 르 메르 신부의 1892~1893년 연례 보고서에 “오상골공소 교우가 37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1896년 제2대 주임 정규하 신부가 부임하고, 새로 원주본당이 설립되면서 풍수원본당 관할 구역은 횡성, 원주, 춘천, 평창, 영월 일대로 축소됐다. 정 신부가 공소 순방을 한 번 떠나면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오상골공소는 1892년 이전에 이미 설립됐고, 풍수원본당 39개 공소 중 가장 규모가 큰 공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본당 교우들에 대해 “몇몇을 제외하고는 수계 범절을 잘합니다. 부녀회는 선업에 힘쓰고 있어서, 자기들의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전혀 연고가 없는 어떤 맹인 노인을 보살펴 왔으며, 토요일과 주일마다 외교인들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바칩니다.…회장들은 늘 그랬듯이 주일에 소년들을 가르칩니다. 부인들 역시 소녀들에게 기도나 교리 또는 한글을 가르칩니다.”(1927~1928년 연례 보고서 중에서)


순교자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신앙생활

지금의 오상골공소는 1928년부터 자리하고 있다. 6ㆍ25 전쟁이 끝나고 유현초등학교가 새 교사를 짓기 위해 건물을 헐자 목재를 얻어다가 1959년 5월 8일 99㎡(30평) 규모의 공소를 지어 축복했다. 2000년대 들어 귀농한 교우들이 많아지면서 33㎡(10평)를 확장해 지금의 132㎡ 공소 건물로 새로 단장했다.

오상골공소는 한식 목조 건물 형태를 띤 장방형 건축물로 천장의 서까래와 중앙 용마루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 외부는 벽돌과 황토, 나무 기둥으로 치장돼 있고, 내부는 흰 벽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돼 있다. 양쪽 벽면에 넓은 창들을 내어 채광을 밝게 했고, 제단을 회중석보다 높게 해 교우들이 자연스럽게 제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원주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발행한 「공소에 가볼까?」는 오상골공소에 관해 “많지 않은 신자이지만, 모두가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깊은 자부심 속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신앙의 모범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라고 소개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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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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