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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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신앙의 뿌리만큼 견고한 하느님의 집

[공소(公所)] 30. 원주교구 청일본당 갑천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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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청일본당 갑천공소는 병인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할 만큼 신심 깊은 교우촌이다. 갑천공소는 6ㆍ25 전쟁 이후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석조 성당 모습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다.

 

 


원주교구 청일본당 갑천공소는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청정로 245에 자리하고 있다. 갑천면은 삼한시대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泰岐王)이 신라의 박혁거세와 맞서 싸우다 패하고만 역사의 현장이다. ‘갑천(甲川)’이란 이름도 신라군에 쫓기던 태기왕의 군사들이 이곳 개천에서 한숨을 돌리며 피 묻은 갑옷을 씻었다 해서 불리게 됐다.

횡성 일대에는 갑천면뿐 아니라 태기왕에 관한 전설이 얽힌 마을과 산 이름이 여럿 있다. 갑천면 ‘어답산’(御踏山)은 태기왕을 쫓던 박혁거세가 이 산에 들렸다 해서 부르게 됐다. 또 인근 공근면 수백리(水白里)는 태기왕이 패퇴하는 순간에도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물줄기에 매료돼 감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울러 횡성군 청일면에 있는 병무산(兵武山)은 태기왕의 병사들이 무술을 연마하고 훈련을 한 곳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강원도와 횡성군은 태기왕의 전설이 얽혀 있는 횡성호수 일대를 도는 여섯 구간의 길을 조성해 관광자원으로 하고 있다. 횡성호수길 여섯 구간은 ‘횡성댐 길’ 3㎞, ‘능선길’ 4㎞, ‘치유길’ 1.5㎞, ‘사색 길’ 7㎞, ‘가족 길’ 9㎞, ‘회상길’ 7㎞ 등 총 31.5㎞의 산책로다.
 

 

 

갑천공소는 기둥이 없는 강당 형태의 내부 공간을 유지하고 급경사 지붕을 올려 실제 규모보다 크게 보이게 하는 독특한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이 양식은 6ㆍ25 전쟁 이후 1950년대 말까지 유행한 한국 교회의 건축 양식이다. 

 


강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받아들여

횡성은 강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인 곳이다. 횡성 지역은 183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있었다. 「포도청등록」에 따르면 심능석이 1838년 교리를 배워 횡성의 자기 집에서 샤스탕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심능석은 1845년 용인으로 이주했다가 1862년 다시 강릉 계촌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됐다. 또 1862년에는 홍천에 거주하던 조형원이 횡성의 박도현에게 교리를 배워 그의 집에서 페롱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강원도 교우 가운데 53가 횡성에 거주할 만큼 횡성은 박해 시기 강원도를 대표하는 신앙 공동체였다.

그만큼 횡성군 갑천의 신앙 뿌리도 매우 깊다. 갑천 지역에 교우들이 모여 살면서 교우촌을 이룬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전이다. 갑천, 둔내, 공근 지역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꾸렸다. 포동리 저고리골과 밤골이라 불리는 율동리가 대표적인 갑천의 교우촌이다. 1866년부터 1870년대까지 이어진 병인박해 동안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삶과 영성, 순교 과정을 직접 목격하거나 이를 전해 들은 교우들의 증언 기록인 「병인치명사적」에 따르면 갑천 저고리골에 살던 윤 가타리나, 윤 서방 내외, 김 아가타, 심정서와 윤성여(윤성이) 바오로 등 많은 교우가 순교했다고 증언한다.

갑천공소의 뿌리인 밤골공소는 풍수원본당 초대 주임인 정규하 신부가 1922년 3월 31일 자로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한다. 정 신부는 풍수원본당 관할 공소 목록을 편지에 첨부했는데, 그 목록에 강원도 청일면 신북창 밤골공소라고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 원주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발간한 「공소에 가볼까?」에 갑천공소 설립연도를 1930년도라고 밝히고 있는데, 밤골을 갑천의 뿌리라고 한다면 공소 설립일을 ‘1922년 또는 1922년 이전’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갑천공소는 1999년 새롭게 단장해 성모 동산과 넓은 주차장 등을 깔끔하게 갖추고 있다.

 


1922년 이전 설립된 밤골이 갑천공소 뿌리

갑천공소 교우 대부분은 화전(火田)을 일구고 살았다. 정규하 신부는 1922~1923년 연례 보고서에서 “일반적으로 교우들은 어렵게 살고 있다”고 밝혔다. 갑천의 교우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전으로 생활하며 교우촌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1966년 화전 정리법이 제정되면서 교우들도 생계를 위해 면 소재지로 내려와 살기도 하고 도시로 이주하면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의 맥이 쇠락해지기 시작했다.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강원도 지역에 진출해 사목했다. 1951년 11월부터 6ㆍ25 전쟁 동안 제6대 횡성본당 주임으로 사목했고, 다시 1954년 11월 제9대 주임으로 부임한 아투라 맥마흔(Arthur McMahon, 한국명 안성도) 신부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목조 성당을 미군의 도움으로 다시 지어 1956년 석조 성당을 봉헌했다. 맥마흔 신부는 성당 건축과 함께 관할 지역에 9개의 공소를 설립하는 데 갑천공소도 1955년 정식 설립된다. 성당을 완공한 후 맥마흔 신부는 공소 건물도 새로 짓기 시작했다. 지금의 갑천공소도 1958년 지어졌다.



급경사 지붕 올리고 단단한 돌로 외벽 장식

6ㆍ25 전쟁 이후 1950년대 말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는 견고한 성과 같은 모습의 성당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외벽 마감을 단단한 돌로 장식하고 내부는 기둥이 없는 강당 형태로 지어졌다. 그 대표적인 성당이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과 의정부 주교좌 성당, 원주 원동 주교좌 성당, 강릉 임당동성당, 횡성성당, 안동 목성동 주교좌 성당 등이다.

갑천공소 역시 당시 교회 건축 양식에 따라 단단하게 지어졌다. 갑천공소는 화강석으로 치장한 횡성성당처럼 외벽을 단단한 돌로 장식했다. 또한, 내부도 기둥을 없애고 단순한 강당형 형태의 공간으로 처리했다. 또 당시 유행했던 급경사 지붕을 그대로 도입해 밖에서 보는 건물 규모보다 실제보다 크고 높게 보이도록 했다. 갑천공소는 1999년 강당 지붕을 교체하고, 내부를 수리해 지금의 공소 건물로 깔끔하게 단장했다. 또 성모 동산과 주차장 등 공소 공간을 깨끗하게 꾸며 놓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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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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