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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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구우며 신앙 지킨 유서 깊은 공동체

[공소(公所)] 32. 원주교구 횡성본당 도곡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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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횡성본당 도곡공소는 횡성 지역 공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공소이다. 1993년 봉헌된 도곡공소 전경.

 


병인년 박해 피해 숨어든 화전민들 / 옹기를 구워 팔아 연명을 하던 마을 / 지금은 인정을 구워 오순도순 사는 곳

봄에는 진달래꽃 가을엔 고운 단풍 / 가마의 불꽃처럼 소망도 타오르네 / 행복을 나누는 마을 조화로운 산동네

맑은 물 깊은 계곡 새소리 청아하고 / 푸르른 자연 속에 무공해 농산물들 / 저절로 익어가면서 산의 마음 담는 곳

개개비 둥지 안에 뻐꾸기가 알을 낳고 / 팽나무 우듬지에 기생한 겨우살이도 / 보듬고 품어 키우는 인정 깊은 도새울

횡성 도곡리에 사는 이정례 시인의 ‘도곡리 별곡’ 연시조이다. 시인이 읊은 것처럼 원주교구 횡성본당 도곡공소는 박해를 피해 산골 깊숙이 숨어든 교우들이 옹기를 구워 신앙생활을 유지하던 유서 깊은 공동체다.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도곡로 178에 자리하고 있는 도곡공소는 횡성 지역에 현존하는 공소 중 첫 자리를 차지할 만큼 오래된 공소다.


1876년 원종연이 도새울에 신앙 전파

공근면은 동으로 갑천면, 서로 서원면, 남으로 횡성읍, 북으로 홍천군 동면과 접해 있다. 금물산과 시루봉을 끼고 낮은 골짜기와 산지를 이루고 있는 도곡리(陶谷里)는 예부터 옹기를 구워온 마을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고, 동네 사람들은 ‘도새울’이라고 불렀다. 1914년 조선 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논골, 점말을 병합해 도곡리라 했다.

도새울, 도곡 마을에 처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 이는 원종연이다. 그는 병인박해가 끝날 무렵인 1876년께 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도새울로 이주해 정착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옹기를 굽고 살던 조씨와 홍씨 집안사람들을 전교해 세례를 줌으로써 교우촌을 이루었다. 강원도에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것은 원종연처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강원도 깊은 산골로 숨어들면서 비롯됐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강원도 교우의 80 이상이 경기도, 충청도의 경계와 인접한 춘천, 홍천, 횡성, 원주, 평창 등지에 거주했다. 이 지역 가운데 특히 횡성과 원주에 70 가까운 교우들이 살았다. 이는 박해 시기 강원도 교회의 중심지가 바로 횡성과 원주였음을 알려준다.

도곡(도새울)공소는 초대 풍수원본당 주임 르 메르 신부가 사목할 때부터 설립됐다. 1896년 제2대 풍수원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가 르 메르 신부에게 인수받은 관할 공소에 이미 도새울공소가 들어 있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도 1900년 10월과 11월 풍수원본당 관할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도새울공소를 방문했다. 도새울공소를 찾은 뮈텔 주교는 공소 신자들을 혹평했다. “20리 길의 도새울 옹기 마을을 향해 떠났다. 이곳 아이들은 무례하고, 교육을 잘못 받은 것 같다. 불행히도 이것은 부모들 탓이다. 상습적인 노름꾼과 술꾼들도 여럿이 있다.”(「뮈텔 일기」 1900년, 11월 10일)

 

 

도곡공소는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마 속에서 공소 예절 드리고 주일 지켜

아마도 뮈텔 주교는 깊숙한 산골에서 옹기를 굽고 사는 교우들의 고단한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사실 옹기장이 교우들은 화전을 경작하는 교우들보다 더 고되게 살았다. “제 지역의 거의 모든 교우가 생존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경작이 끝났어도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겨우 마련할 정도입니다. 옹기장이들은 사정이 더 나빠서 먹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빚도 너무 많기 때문에 거의 모든 공소가 비참할 지경입니다.”(정규하 신부가 1913년 12월 29일 뮈텔 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가난 때문에 글을 제때 가르치지 못하고 배움으로 이끌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 탓하랴.

도곡공소 교우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신앙심만큼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들은 옹기 가마 속에서 공소 예절을 드리고 주일을 지켰다. 그리고 서로 협력해 떡갈나무 기둥에 억새로 지붕을 씌운 집을 지어 공소로 사용했다. 봄, 가을 판공 때에는 인근 학담리(초당, 노루미), 매곡, 공근, 창봉리(안말, 하우개) 공소 교우 150여 명이 모두 도곡공소로 모여들어 성사를 보았다.

또 도곡공소 교우들은 풍수원성당을 지을 때 1905년부터 1907년까지 2년 동안 일주일 가운데 4일은 옹기를 굽고, 나머지 3일은 점심을 싸서 풍수원으로 걸어가 벽돌 굽는 일을 하는 등 아낌없이 봉사했다. 이런 일만 봐도 도곡공소 교우들이 얼마나 열심했는지 알 수 있다.

떡갈나무 공소는 1931년 무너졌고, 도곡의 옹기장이 교우들은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1938년 초가 공소를 마련했다. 이 초가 공소는 6ㆍ25 전쟁 당시 중공군에게 징발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교우들은 십자가의 길 14처와 성물들을 무신론자들에게 훼손되지 않도록 마룻바닥에 숨겨 보존했다.

 

 

 

도곡공소 정문은 1938년부터 55년간 사용돼 오던 초가 공소의 대들보들을 모아 만든 문으로 도곡공소 교우들의 신앙 전통을 웅변하고 있다.

 

 


옛 초가 공소 대들보로 새 공소 정문 제작

55년간 신앙의 보금자리로 사용돼 오던 초가 공소는 너무 낡아 1993년 교구와 횡성본당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새 공소를 마련해 봉헌했다. 지금의 공소 정문은 옛 초가 공소의 대들보들로 만들어졌다. 유구한 도곡공소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함이다.

도곡공소는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한 모습을 띠고 있다. 서양의 초기 성당 양식처럼 내부에 기둥이 없는 일자형 단층 적벽돌 건물에 아치형 제단을 꾸며 놓고, 그 위에 한국형 기와지붕을 올렸다. 제단을 중심으로 양측 벽면에 넓은 창을 내어 실내 공간을 밝게 유지하고 있다. 아치형 제단 앞부분에 또 다른 집 형태의 벽을 쌓아 자연스럽게 시선이 제대로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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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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