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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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순교자 후손들이 일군 신심 깊은 공소

[공소(公所)] 49. 대전교구 신례원본당 수철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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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신례원본당 수철리공소는 병인박해 순교자 손자선ㆍ황석두 성인의 후손들이 일군 신심 깊은 공소이다. 2014년 개조한 수철리공소 전경.



대전교구 신례원본당 수철리공소는 충남 예산군 예산읍 수철길 630에 자리하고 있다.

수철리(水鐵里)는 이곳에서 철이 많이 생산돼 ‘무쇠골’, ‘수철동’으로 부른 데서 유래됐다. 또 수철리는 전통 한옥 방바닥을 만드는 얇고 넓은 돌인 ‘청돌’(방장돌) 산지로도 유명했다. 수철리는 조선 시대 예산군 금평면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임성면에 편입됐다. 이어 1917년 임성면이 ‘예산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40년 예산면이 예산읍으로 승격돼 예산읍 수철리가 됐다.

예산읍 동부에 자리한 수철리는 동쪽으로 아산시 도고면, 서쪽으로 신례원리, 남쪽으로 향천리, 북쪽으로 간양리와 접하고 있으며 해발 400m가 넘는 덕봉산과 용굴산, 안락산, 토성봉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골 마을이다.



손자선 성인 일족 피신해 신앙생활 이어가

수철리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았으나 실질적으로는 병인박해 순교자 손자선(토마스) 성인과 황석두(루카) 성인의 후손이 일군 신앙 공동체다.

손자선 성인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손자선은 덕산 관아에서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뒤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소식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 혼자서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가 체포됐다. 덕산 관장은 그를 옥에 가둬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해미로 보냈다. 손자선은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켜 다시 공주 감영으로 이송됐다. 손자선은 공주 감영에서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황석두 성인은 충청도 연풍 양반 가문에서 자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돼 입교했다. 그는 부친이 반대하자 3년간 말문을 닫고 교리서를 탐독했다. 이에 감동한 부친과 온 가족이 입교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해 조선대목구장 주교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복사와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생활을 했다. 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던 다블뤼 주교를 따라가다 체포돼 다블뤼 주교와 함께 그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5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병인박해가 계속되던 1868년에 덕산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에 페롱 신부와 천주교인이 관련돼 더욱 혹독한 박해가 가해졌다. 이 때문에 손자선의 일족인 손세당의 자손 손정호·손영택 등이 수철리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수철리공소 교우들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물론 기도와 성사생활의 모범이 된 공소로 널리 알려진 신앙 공동체다. 수철리공소 내부.

1900년께 교우촌 신자 늘면서 공소로 설립

이들이 수철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이미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간양골 교우촌이 산길로 1.5㎞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양골을 비롯한 내포의 교우들은 수철리를 통해 도고산을 넘어 아산 등 충청도 내륙을 오갔다. 또 신례원 창말 포구에서 배로 무한천과 삽교천을 따라 타지방 교우촌과 교류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890년 간양골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됐으나 5년 만에 폐지돼 양촌본당 관할 공소가 됐다. 수철리 교우촌은 교우가 늘면서 1900년께 공소로 설립됐다. 합덕본당 초대 주임 퀴클리에 신부의 1901년 연말 보고서에 수철리공소를 ‘뒤란공소’라고 표기하고 있다. 수철리의 옛 지명인 ‘드른리’를 라틴어와 불어로 ‘뒤란’으로 표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7대 합덕본당 주임 페렝 신부는 1922년 연말 보고서에서 수철리공소가 아이들의 교리 문답 교육을 잘하는 모범 공소로 칭찬했다. 박해 시기와 일제 강점기에 수철리공소 교우들은 화전을 일궈 담배 농사와 양잠업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들은 궁핍한 가운데도 판공성사를 위해 사제가 방문하면 쌀밥을 준비해 대접했다. 또 산과 들에서 일하다가도 종소리가 들리면 모두 일손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할 만큼 신앙심이 깊어 1930년대 초에는 100명이 넘는 교우들이 모여 살면서 활성화돼 ‘선교촌’이라고 불렸다.
 
대전교구 신례원본당 수철리공소 성모상.


6ㆍ25 전쟁 이후 황석두 성인의 후손 정착

6ㆍ25 전쟁 이후 수철리공소에 황석두 성인의 손자 황만호 가족이 이주해 정착한다. 그는 부친과 함께 박해를 피해 충북 연풍에서 아산 만보골, 예산 수골, 도고 신유리로 떠돌다 간양골에 정착했다. 그는 간양골에서 가정을 일구어 신앙생활을 하다 6ㆍ25 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간양골 교우촌이 폐허가 되자 수철리로 이주했다.

황만호와 그의 아들 황기완은 대를 이어 수철리공소 회장을 하며 순교 성인의 후손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황기완은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다 1960년에 교우들과 함께 16그루 나무를 베어 대들보로 삼아 ‘새터’에 공소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성탄ㆍ부활ㆍ성모 승천 대축일 때면 교우들과 2시간 길을 걸어 예산성당 미사에 참여했다.

수철리공소는 1977년 신례원본당 설립과 함께 관할 공소가 됐다. 1980년대 들면서 수철리공소는 급속하게 쇠퇴한다. 여느 공소처럼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났기 때문이다. 지금의 수철리공소는 2014년 당시 신례원본당 주임 이상호 신부의 노력으로 개축됐다. 이 신부는 조경수와 석조물, 성물을 기증받아 공소를 꾸미고 옛 모습을 보존한 채 새 단장을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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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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