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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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평화칼럼] 어떤 그리움일까

이소영 베로니카(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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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몇 학기를 보냈던 미국 동부의 대학도시는 겨울이 길고 춥기로 유명했다. 12월에서 2월 사이엔 여러 날에 걸쳐 눈보라가 일었고, 그럴 때면 눈이 정강이까지 쌓이고 마을의 길 사이 경계선이 흐릿해졌다. 대학원 기숙사에서 기숙사 식당이나 식료품 가게로 이어지는 샛길도 눈에 폭 파묻히곤 했다. 그렇지만 난 걱정이 없었다. ‘과자의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기숙사동 지하 코인 세탁실엔 스낵 자판기가 한 대 놓여 있었고, 내 일용할 양식 가운데 팔할은 거기서 나왔다. 추정컨대 내가 그 기숙사동에 입주한 이후 자판기 내용물을 채워넣는 주기가 빨라졌을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거기서 과자를 꺼내어 먹었으니 말이다. 눈 내려서 고립된 동안의 식단은 아침엔 초콜릿바, 점심엔 치즈 크래커와 두유, 저녁엔 딸기웨하스와 초코우유, 이런 식으로 짜였다. 자판기엔 귀리와 견과류와 꿀을 버무린 바삭한 곡물 과자도 들어있었다. 영양을 고려해 하루 한 번 그 곡물 과자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기숙사동 4층엔 나와 같은 장학 프로그램의 수혜자였던 한국인 선배 언니가 거주했다. 한문으로 된 고서를 읽고 공부하던, 도자기로 빚어낸 인형처럼 하얗고 예뻤던 언니는 간단하고 따끈한 가정 음식을 3분 요리처럼 뚝딱 만들 줄 아셨다. 언젠가 자판기 과자로 채워진 내 식단에 대해 알고서 쯧쯧 하시더니, 일주일에 몇 번 저녁에 나를 4층 공동부엌으로 불러내 감자 송송 썰어 넣은 수제비나 칼국수, 두부조림이나 새우 볶음밥 등을 만들어 먹였다. 부추전을 부쳐 먹기로 한 날 내가 실파와 부추를 구분하지 못해 마트에서 파를 사 들고 온 후론 “너는 요리 거들지 말고 그냥 먹기만 해”라 하셨다. 대신 난 ‘과자의 여왕’답게 언니에게 후식을 대접했다. 식탁 치우고 설거지 마치면 우린 2층의 내 방으로 내려가 뜨거운 차를 끓여 마셨다. 그 시간을 위해 두세 종류의 티백과 비스킷을 항상 서랍에 쟁여 두었다.

그때도 거센 눈보라로 인해 기숙사에 갇혔던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 식사 후 박하차를 마시던 중 언니가 대학 시절 클래식 기타 배우던 이야기를 하다 “혹시 너 ‘어떤날’이라고 들어봤어?” 물으셨다. “이병우씨와 조동익씨로 구성된 그 ‘어떤날’이요?”하며 알은 척했더니 조동익씨의 솔로 음반에 수록된 곡들을 꼭 들어보라셨다. 두 연주자 중 이병우씨의 곡들은 이성 쪽에 더 닿아있다면 조동익씨의 곡들은 한층 감성적인데, 너한텐 왠지 후자가 어울린다며 말이다. 한 곡 추천해달라는 부탁에 잠시 고민하시더니 “아, 너 성당에 다니지?”라며 ‘엄마와 성당에’란 노래를 검색하여 들려주셨다.

듣고 나서 울먹울먹했다. 손에 쥐고 있던 초콜릿 과자 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갑자기 그러니 언니는 내가 한국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줄 오인하고 다독이셨다. 사실 그 순간 혈연적 어머니를 떠올렸던 게 아니었지만, 말을 더 잇진 못했다. 당시의 마음을 오롯이 언어화하여 표현해낼 자신이 없어서.

겨울밤, 노래를 오랜만에 찾아 들으며 생각한다. 나는 이른바 모태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데다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지도 않았다. ‘성당 가면 머리에 하얀 보자기를 쓰고 하얀 마리아상에 꾸벅 인사한다더라’ 정도가 13살이 되기 전까지 가톨릭에 대해 막연히 알던 전부였다. 그러니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성당 간 기억은 없다. 아니, 교회든 절이든 가족들과 가본 적 없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종탑 꼭대기’와 ‘종 치는 아저씨’에 대한 유년기 기억은 「노트르담의 꼽추」 그림책의 삽화가 전부일 텐데 왜 지금껏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마음이 “풍선처럼 부는 바람 속에 어쩔 줄 모르”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에 대한, 어떤 성격의 그리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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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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