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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명동의 ‘파란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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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입구 도로변에는 파란색 천막이 세워져 있다. 거기 걸린 현수막에는 ‘명동재개발2지구 강제집행 저지투쟁 농성장’, ‘가게는 삶이다. 폭력적인 강제집행 중단하라!’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명동성당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좁은 골목과 작은 건물들. 땅값이 제일 비싸기로 손꼽히는 명동에 시골 읍내 분위기의 골목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랍다. 한때 ‘먹자골목’으로도 불리던 이곳 을지로2가 163-3번지 일대는 1983년에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지만, 명동에서 유일하게 재개발 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도시 정비’라는 이름의 재개발 광풍이 밀려왔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 이상 장사를 하다가 대책 없이 쫓겨나게 된 상가 세입자들이 문제였다. 그들 일부가 ‘24시간 농성’을 이어가는 파란 천막에 시민사회·종교 단체가 만든 공동대책위원회와 벗들이 찾아온다. 이들 ‘연대인’들은 세입자 대책위원회와 함께 여러 차례 기자회견·기도회 등을 통해 중구청과 재개발 사업 시행사에 세입자 대책 마련을 요구해 왔다.

농성 천막 안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변두리 상영회’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기도회와 예배도 드린다. 추석에는 세입자와 연대인들이 모여 전을 구워 먹고 윷놀이를 했고 성탄절과 연말에는 뱅쇼와 케이크를 만들었다. 명동 한복판에서 농성하는 세입자들이 외롭지 않도록 이곳을 찾아오는 연대인들 가운데 다수가 20~30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1년 전 겨울에는 목요일 저녁마다 중구청 앞에서 기도회를 개최했다. 손발이 얼어붙는 추위에도 길가에 모여 현장의 소리를 듣고 정성껏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거행했다. 그리고 ‘주님 오세요, 빈 자리 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할 용기를 주옵소서’, ‘사랑이 이긴다’ 같은 노래를 불렀다. 기도회가 마치면 ‘연대하는 채식인 모임’에서 준비해온 소박하고 따뜻한 저녁을 나눠 먹었다. 결국 지난해 10월 중구청은 세입자대책위와 시행사의 대화를 위한 사전협의체를 주관했다. 두 차례 협의가 있었고 이제는 직접 면담을 앞두고 있다. 세입자들과 연대인들은 이런 대화의 자리를 통해 문제 해결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며 강제집행을 막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세입자들이 지난해 5월에 세운 천막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파란 농성 천막은 해를 넘기면서 세입자들과 젊은 연대인들을 엮어준 우정의 자리였다.

위에 언급된 종교단체는 고난함께, 옥바라지선교센터, 평화교회연구소, 촛불교회, 사이교회 등 대부분 개신교 배경이다.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7년, 강제 철거로 보금자리를 잃은 상계동 173번지 세입자들이 명동성당과 교구청 입구에 대형 천막을 치고 여덟 달 동안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그 천막도 파란색이었다.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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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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