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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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한담] 성령묵상회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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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회화를 하면서부터 동양사상과 동양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다. 특히 동양의 기사상이라든가, 음양오행론에 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왔지만 결국 사상과 철학의 근간은 종교적이고 영적인 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음양오행에 심취하다 보니 신비주의에 빠져들기도 하여 신적인 존재나 영적인 세계를 찾으려는 노력도 했었다.

그러한 종교적 편린 끝에 1991년에는 가톨릭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례성사 즉, 물과 기름에 의한 세례를 받고, 다음에는 더욱 굳건한 믿음을 위해 견진성사를 받았다. 또 소위 불세례라고 하는 성령묵상회 등을 통한 성령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나는 그 무렵 유인성 신부님의 성령묵상회 안수 중에 바위처럼 큰 불덩어리가 머리 위에 내려오면서 전신이 감전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고,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신령한 언어가 글자화되는 심령 글씨를 쓰게 되었고, 그 언어는 리듬을 타고 노래로 나오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영가(靈歌)라고 할 수 있다. 노래는 시작과 끝도 없이 저절로 작사 작곡이 되어 불러졌다. 글씨도 자동필기로 글씨가 저절로 빨리 써지는데 한 자도 흐트러짐 없이 질서 있게 기록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작품 제작에 들어갔을 때 어느 틈에 그 글씨들이 나의 작품 속에 잠식해 들어왔음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로 인해 그림이 마무리가 안 되고 망쳐버리는 결과가 자주 일어났다. 나의 의도와 그 글자 조형이 서로 불협화음을 낸 것이다. 결국 기도 중에 나는 자동 필기되는 그 의도에 따라주라는 무언의 암시를 받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위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 후부터 나는 무작위적 글자의 조형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그림의 소재도 자유로워졌다. 그 심령 글씨가 나의 조형적 회화 세계를 점유하여 나의 조형적 사고와 신적 문자 조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표출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 순수조형감각과 신비적 로고스와의 만남이었다. 나의 경험적 미의식과 초월적 미의식과의 융화였다.

이른바 ‘묵시찬가’(?示讚歌) 시리즈는 이렇게 해서 제작되었다. 이들 작품에 나타난 심령 글씨들은 하느님에 대한 찬미, 감사, 참회, 비탄, 예언, 교훈, 찬양, 찬가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과의 묵시적 심령 기도문이다. 그것이 언어의 한계성과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거나 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 자신을 위해 조배 드리는 것이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지금도 이 세 가지(심령 언어와 심령 글씨, 심령 노래) 기도 형식은 변함없이 나의 신앙과 작품세계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 이 묵시적 ‘사유문자’(思惟文字)는 내 작품 속에서 하느님을 통해 참나(眞我)를 찾기 위한 표현 기제로 내 잠재의식 속에 들어앉아 있다.



윤여환 요한 사도(충남대 회화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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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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