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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화해 일치] 나의 미래를 맡긴 신용카드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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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은 굶어 죽을지라도 종자를 베고 죽어야 하며 장사꾼은 끼니를 거를지라도 밑돈은 깔고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열약한 경제상황에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영리하게 살아가는 북한여성들의 신조어다. 사회주의 배급제도가 종말을 고한 북한에서 생계를 이어나가려면 시장을 통한 여성들의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현재 북한시장은 경제성장의 축으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절대다수의 주민들은 시장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장사거래는 개인이 가진 자본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내가 가진 돈이 얼마인지에 따라 장사품종이 결정되며 수입이 높아진다. 때문에 장사밑돈이 적거나 없으면 판매할 상품도 넘겨받을 수 없게 되며 비싼 값에 거래되는 매대(자리)도 차려지지 않는다. 북한여성들에게 장사밑돈은 온 가족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부분으로 각인된다.

북한주민들은 목숨과 같은 장사밑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남한처럼 카드나 통장을 통해 거래되는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못한 데다 매일 물건을 받고 팔다 보면 돈이 은행에 머물 여유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남한에 처음 정착한 탈북자들은 카드보다는 현금으로 모든 것을 거래한다. 피 같은 내 돈을 은행에 맡기는 일은 마치 강가에 아이를 홀로 내보낸 것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생각한다.

나는 하나원에서 발급해준 통장을 받아들고 난생처음으로 현금인출기에서 출금한 적이 있다. 기계에서 금방 꺼낸 따끈따끈한 현금을 보니 신기했다. 주변에서 누가 나의 비밀번호를 훔쳐보나 싶어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사람들은 나를 인지하지 않고 자기 볼일만 봤다. 그렇게 1년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마트나 영화관에서도 돈 계산을 할 때면 지갑 속에 얼마가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지 모른다. 북한에서 상품을 살 때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면서 돈을 정확히 세주던 그때처럼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광고에 유혹되어 마침내 은행 카드를 발급받게 되었다.

남한에 와서 간판이나 홍보 포스터를 보면 영어글자가 많다.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푸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넓고 탄탄한 도로가 그려져 있는 은행 광고를 보게 되었다. 광고문구에는 “ㅇㅇ을 믿으면 당신의 앞날에 탄탄대로만 열린다”고 씌어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정말 ㅇㅇ카드를 만들면 내 앞날이 환하게 열릴 수 있다는 원인 모를 충동이 일어났다. 그렇게 카드를 만들고 난 후에는 천 원짜리 한 장도 아껴 쓰던 종전의 생활방식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무조건 낭비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전환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지금은 체크카드를 뿐 아니라 신용카드도 사용하고 있다. 지인들과 카드혜택에 대한 실용 있는 정보도 공유하고 있으며 화장품도 일시불이 아니라 6~12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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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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