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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정의를 말하려면 더 정의로워야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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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8일, 경향신문 1면 머리를 장식한 기사는 마치 지진처럼 연말 정치권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다.

이 기사의 요지. “2008년 10월, 한나라당 소속 주성영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100억 원 비자금(양도성예금인 CD형태)’을 폭로했으나 대검 중수부의 수사 결과 허위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당시 음모적 시나리오를 제보한 이는 현 국민의당 박주원 최고위원이다.”

당장 국민의당과 호남지역이 발칵 뒤집혔다.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는 정당의 최고위원이 ‘김대중 죽이기’에 나섰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안철수 대표는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며 호남 지역 여론을 갈구하던 중이었다. 처음부터 통합에 반대했던 호남지역 의원들은 안 대표에 더욱 강하게 맞서면서 국민의당 내부 갈등과 통합일정의 혼란은 최고조에 달했다.

큰 특종이었다. 특종기사라 하면 단독기사로서 다른 매체가 받아쓰는 보도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특종기사를 받아 보도하는 매체는 기사본문에 ‘○○○○의 보도에 따르면···’ 등의 표현으로 인용 매체를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절도행위’와 다름없는 표절에 해당한다. 이는 신문·방송·인터넷 등 모든 매체의 보도윤리 규정으로 명시돼 있으며, 오래전에 보편타당한 ‘저널리즘의 기본수칙’으로 자리 잡았다.

정국에 큰 파장을 몰고온 위 기사는 당연히 모든 매체가 받아서 보도했다. 그런데 기사를 받은 매체들의 보도태도가 저마다 달랐다. 저널리즘의 수칙대로 소스를 밝힌 매체가 있는가 하면, 아예 밝히지 않는 매체에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이라고 불특정 익명 소스로 대신한 매체도 많았다. 심지어 소스를 밝히지 않은 매체들 중에는 평소 어떤 매체보다 앞장서서 저널리즘 정신을 강조하던 데도 있었다.

인용매체를 밝히지 않거나 불특정 익명 매체로 대신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표절이다. 해당 매체의 관련 윤리기구에서 ‘경고’ 등의 징계조처를 받거나 법적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이른바 선진국에서 표절행위는 중대한 범죄로 취급된다. 민사소송에서는 손해배상액이 엄청나게 나올 수 있고, 작은 규모의 피고 매체라면 문을 닫기 십상이다.

이에 비하자면 우리나라에선 표절에 대해 엄격하지 않다. 엄격하지 않다기보다 차라리 관대하다고 해야겠다. 재판부나 학계·언론계뿐 아니라 전체 사회풍조가 그러하다. 가령, 그 많은 표절의혹 당사자들이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회 인사 청문회를 버젓이 통과해 국정의 고위책임자로 진출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계는 매체의 홍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매체를 연결하는 스마트폰 등은 생활 필수 소지품이 됐다. 우리나라에는 신문·방송 같은 올드 미디어 외에 인터넷 매체만 8천여 개다.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상 미디어는 양적·질적으로 어느 때보다 크게 확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은 “미디어는 그 본질상 개인뿐 아니라 대중과 온 인류사회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지만 지금은 “~~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가 됐다.

교회는 미디어가 공동선을 위해 선용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 공적 권위를 갖출 것을 촉구하고 있다. 언론에게 공적 권위를 갖추라는 건 도덕률, 즉 저널리즘의 수칙인 보도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로 말할 것 같으면 미디어의 양적 확장에 균형추 역할을 할 도덕률을 미처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용자들로부터 ‘기레기’라는 욕을 먹기도 한다.

많은 매체 경영자와 보도 종사자들은 보도윤리를 잘 모르고 있다. 설사 안다고 해도 치열한 경쟁의 아수라장에서 상업주의에 매몰돼 잘 지키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제대로 취재를 하지 않고 다른 매체의 기사를 베끼거나 조합하는 사례는 흔하디흔하다.

해당 윤리 기구가 징계조처를 내리지만 큰 구속력이 없다. 그렇다고 표절 매체들이 법의 도마 위에 잘 오르지도 않는다. 사실 기레기라고 욕을 하는 수용자들도 잘 모른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표절에 대해 관대하다고 하지만 언론계의 표절은 더욱 문제가 크다.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이 돼야”하기 때문이다.(1971년 주교 시노드 문헌, ‘세계정의’ 38항)


김지영 편집인은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편집인,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심의실장,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주교회의 자문위원 및 매스컴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영 (이냐시오) 전 경향신문 편집인
김지영 편집인은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편집인,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심의실장,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주교회의 자문위원 및 매스컴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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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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