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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아들아, 이젠 기다림마저 행복이란다 / 문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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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병원에서 퇴원하는 대로 시골에 다녀가겠다는 전화를 받은 아비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너를 기다렸다. 나는 네게 기왕이면 꽃이 지기 전에 다녀가라는 당부를 했었지. 우리집 너른 마당에는 매화가 지긴 했어도 민들레, 코딱지꽃, 제비꽃, 수선화, 이팝꽃, 산벚꽃, 복사꽃, 철쭉,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부모 마음에는 서울에서 강파르게 살고 있는 너에게 화려한 고향의 봄꽃을 가슴 시리게 보여주고 싶었단다. 꽃은 언제나 풍진 세상에서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해주는 묘약이 되기 때문이다.

3년 만에 고향에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문득 네 아들 준철이 유치원 다닐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손자에게 발갛게 익은 자두를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준철이를 데리고 오기로 한 전날 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 자두가 모두 떨어져 버렸지. 우리 부부는 새벽에 일어나서 떨어진 자두를 실에 꿰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기다렸단다. 허나 급한 환자가 생겼다면서 손자를 데려오지 못해 우리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매달아 놓은 자두를 쳐다보며 연신 한숨만 쉬었단다. 지금도 우리는 그때를 떠올리며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들아 고향에 자주 좀 오렴. 지금 우리 늙은이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식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제는 기다림마저도 우리에게는 큰 행복이란다.

너는 꽃비가 불불 날리던 날 생오지 마을에 와주었지. 네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우리 부부는 80노구를 이끌고 새벽에 뒷산에 올라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하는 취며 두릅을 뜯고 마당에서 쑥과 머위를 채취하여 푸짐하게 나물 반찬을 준비했다. 수척해진 너는 사흘 동안 밥은 입에도 대지 않고 향기가 죽인다면서 초식동물처럼 나물만 먹었다.

탄성을 연발하며 게걸스럽게 봄나물을 먹는 너를 보며, 네가 생명력이 가득한 봄기운을 섭취하는 것 같아 오달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단다. 너는 꽃동산이 된 우리 집을 둘러보며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거듭 말했지.

부모 곁에서 겨우 이틀 밤을 자고 떠나는 너의 애잔해 보이는 뒷모습에 아버지 어머니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쓰라렸다. 병원에서 환자 돌보랴 강의하랴, 두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삶에 지친 네가 가엾고 미안한 마음에 목울대가 후끈거렸단다. 나는 바쁜 일상이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가는 너에게 “시간 속에 갇혀 살지 말고 시간 밖에서 여유롭게 살도록 해라.”고 당부했지. 어차피 네 인생의 시간은 네 것이 아니더냐. 이제 아비의 시간은 가고 너의 시간이 오지 않았느냐. 너에게는 오고 있는 시간이 아직 많으니 부디 너무 쫓기듯 숨 가쁘게 살지 말아라.

어느덧 너도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으니 슬로우 라이프(Slow Life), 천천히 느리게 살면서 행복을 찾아야할 때가 아니냐. 가볍다고 하면 한없이 가볍고 무겁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무거운 것이 인생이란다. 제발 네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지고 살아라. 늘 마음 비우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기 바란다. 늙은 부모는 너에게 버거운 짐이 되기 싫으니 우리 걱정은 말거라. 우리 부부 아직 건강해서 아침마다 나란히 앉아, 앞산 바라보며 커피 마시는 행복을 누리며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안심해라. 깊은 골짜기 마을 생오지는 적적해서 꿈꾸기에 참 좋구나.


문순태(프란치스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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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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