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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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고해소의 통곡 / 임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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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회복은 은총의 회복이요, 참 생명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그 길목에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거저 받는 신자만의 특권이자 구원의 통로인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상설 고해소 안내문 중 일부)



영세 후 첫 고백성사. 참 힘들었다. 이걸 꼭 해야 하는 것일까.

교리 시간을 통하여 잘 배우고 들었건만 막상 한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신부님의 존재 때문이었을까.

힘겨운 나와의 싸움, 아니 두려움과 부끄러움. 하여간 잘못을 하긴 꽤 했나 보다가 아니라 매일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

왜 꼭 잘못을 좁은 고해소에 들어가 신부님에게 해야 하는가. 사람 사는 세상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나는 또 얼마나 이중적인가.

살면서 순간순간 내비쳐진 악마 같은 모습은 다 감추고, 수도 없이 부대끼며 양면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내비쳐야 했던가. 양심 성찰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잘못을 변명하려 끙끙거리며 미사여구만 늘어놓았던가.

남에게는 “솔직하자”는 말을 수없이 뱉어 내면서 나는 내 속을 얼마나 열었던가. 주님 앞에서조차 나를 감싸려 하다니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다. ‘매번 다짐하면서도 안 되는 이 나쁜 마음을 허물어 버려야 하는 데…’를 수없이 되뇌면서도 변하지 않는 나를 자책한다.

매번 수박 겉핥기식으로 앵무새처럼 “이 외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고해받는 신부님께서도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면 참 답답해하실 것 같다. 알맹이는 저 깊숙이 감추고 겨우 변죽만 울리다가 만 것을….


고해소를 나오며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다 씻어낸 듯 해방감과 안도감, 그러면서도 뭔가 다 하지 못한 찝찝함. 뒤가 켕긴다.

같은 잘못의 반복. 나는 이미 나의 내면의 갈등조차 못 다스렸으니 천당 가기는 틀린 것 같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그저 습관적으로 고해소를 들락거리는 나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 핑계지만 잠시 냉담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잘못을 낱낱이 고백할 수 있을까. 다 아뢰지 못한 잘못들이 앙금처럼 가라앉았다가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게 아닐까.

그날도 고해소에서 죄를 고백하던 중 나의 잘못을 어떻게 하면 이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던 순간, 왈칵 북받쳐 오르는 울음으로 말을 더듬으며 울먹이다가 쏟아내듯 빠르게 고백하곤 어떻게 고해소를 나왔는지를 모르겠다.

내 속에 숨어 있던 거짓의 껍질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와서도 한참을 나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속이 후련해졌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 나쁜 버릇은 또 쌓여 가고 있다. 오늘도 나의 나약함으로 고해소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뿐일까, 아니 나뿐이기를 바란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많다면 고해소를 내려다보시는 하느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파 통곡하셨을까.

어느 어르신 말마따나 “살아 있는 것이 죄이지요.”하는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임길성(발렌티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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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5-1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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