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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열매 맺는 삶(윤태영, 토마스, 복음화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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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한 해 학비를 내지 못해 2학년 반 배정을 받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둘 상황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학비를 마련하려 백방으로 노력하셨지만, 가난한 저희에게 돈을 빌려줄 곳은 없었지요. 현실을 알았던 저는, 공부에 뜻도 없으니 공장에라도 취직할 생각으로 구인 광고를 보곤 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2학년 첫날, 학교에 간 친구들과는 달리 저는 집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2학년 3반으로 배정됐으니 내일부터 나오라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갑자기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학기가 시작한 첫날, 수녀님 한 분이 화가 난 표정으로 교무실에 들어오셨답니다. 가장 높은 선생님이 누구냐고 물으시고는 그 자리로 가셔서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쾅!’ 하고 놓고는 화를 내셨다는 겁니다. “돈을 내지 못했다고 학생을 오지 못하게 하는 곳이 학교입니까!”

그렇게 떠나신 수녀님이 남긴 봉투는 지난 1년 치 학비였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학생에게 등록금을 지원한다는 한 수녀원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그 수녀원에 찾아가 사정을 하셨던 거지요.

사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에서도 사정은 딱하나 자격이 되지 않아 도와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고 또 청하셨습니다. 마치 한밤중에 빵을 구하러 온 친구처럼 말이죠.(루카 11,5-8 참조) 그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수녀원에서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지원금을 저희 어머니께 주시지 않고, 수녀님께서 학교를 직접 찾아가셨던 겁니다.

철이 없던 당시의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회심하여 신앙을 되찾은 이후에야 감사한 마음이 피어났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 수녀님을 만나러 찾아갔었습니다. 그때 수녀님의 단호했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난 네가 기억도 나질 않아. 잘 살았으면 됐지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가서 열심히 살아!”

수녀님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태도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삶으로 가르쳐주신 듯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누고 정의를 선포한 이후에, 그것을 내 업적과 내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지도 않으셨던 게 아닐지…. 그저 맡겨진 소임에 충실했던 착하고 성실한 종처럼, 하느님께서 일을 마치실 것을 믿고 자신의 몫에 충실하는 것. 그러한 복음의 씨앗을 받은 저 또한, 그렇게 살아서 그 열매가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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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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