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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다수의 힘의 논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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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전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더록 (The Rock)이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요즈음 출시되는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도 액션과 오락으로 퇴색된 상업주의라는 평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없이 보는 영화라고 해서 결코 관객에게 선사하는 메시지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다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논리가 감추어져 있다.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 등 각전지역 어디나 투입되어 애국심을 유감없이 발휘한 베테랑 공수 특전단 사령관인 에디 해리스는 진급 심사에 번번이 제외되는 불만을 품고 한때 아무도 탈출할 수 없는 교도소로 명성을 날렸던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한 알카트라즈 섬에서 80여명의 관광객을 인질로 붙잡고 자신의 공로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가공할 화학무기로 샌프란시스코를 파괴해 버리겠다는 경고를 미국방성에 보낸다.
당황한 미 국방성과 FBI는 에드 해리스와 협상을 하면서 최악의 경우 샌프란시스코를 살리기 위하여 80명의 인질이 잡혀 있는 알카트라즈 섬을 파괴한다는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FBI 소속의 생화학 박사인 스탠리의 설득에 의해서 무산되고 한때 영국 출신의 스파이로 30년 동안 알카트라즈 섬에 복역하다 탈출한 숀 코네리에 의해 인질이 구출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수결의 원칙이란 어떤 안건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의향을 묻는 것이지 결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일 수는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가장 발전한 민주주의 사회의 이면에는 다수의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 아무런 빛도 발산하지 못하며 죽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자는 다수의 목소리에 의하여 집과 가족을 잃은 빈민촌의 사람들. 국민의 손익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버려지는 국회 의안 통과는 다수결의 원칙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도 다수결의 원칙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보편 진리의 잣대로 생각하여 역사 안에서 많은 누를 범했다. 특히 교회는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시작된 선교의 행진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슬로건 하에 그리스도교 문화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많은 소수 민족의 문화를 배타시하고 그들을 지배하였다.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더 이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음을 지난 역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예수님과 소크라테스가 전한 진리의 말씀은 다수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배척당했고 그들은 다수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 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진실은 처음에는 조롱을 당하고 다음에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나중에는 마치 처음부터 자명했던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요즈음 우리 교회는 예수님 탄생 2000년 돌을 기념하여 대희년을 선포하고 예수님께 드릴 생일선물로 새로운 양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입교권면하고 신앙을 저버리고 쉬는 교우들을 찾아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신자들을 보면서 이를데 없이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는 절대적 진리를 하느님을 모르는 이웃에게 독선적으로 이해시키려고 무리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것만을 주장하다 보면 그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환경과 정서 그리고 그들의 종교까지도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종교 창시자보다도 인류에 대한 더 큰 사랑을 가지셨고 결국 그 큰 사랑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이해시키고 이 사랑에 우리도 동참하여 하느님의 한 식구가 될 수 있도록 권유해야 할 것이다. 이 권유 즉 선교한 우리 기존 신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은 끊임없이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우리도 외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성당에 나오지 않고 쉬는 교우들에 대해서도 그 즉시 옛날의 신앙생활로 급선회하라고 강요의 인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는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 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쉬는 교우들 가정에 가보면 집 어딘가에 십자가가 모셔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공감하고 그들이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신앙은 다수결도 아니오 힘의 논리도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진실된 사랑을 우리들의 선한 생활과 사심없는 관심과 애정을 통해서 전달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신자수는 순조롭게 신장되고 신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그만큼 살기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최재용 신부(수원교구 산본본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199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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