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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지상을 떠날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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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신원을 두고 보면, 수도 공동체에서 맡겨진 개인 소임뿐만 아니라 수도원 밖 부르심을 받고 달려가는 일도 적지 않다. 사제라는 신원에서 오는 고유한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흔치 않게 일어난다.

여유가 있어 나지막한 수도원 뒷산을 산책하고 있는데, 노인 시설에서 일하는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르신 한 분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해 중환자실로 옮겼으니 급히 병자성사를 부탁한다는 전화였다. 다른 상황을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집을 한참 벗어난 발걸음을 재촉해 준비해 나섰다. 예전엔 장례 미사를 가거나 아픈 이를 위해 집을 나설 때 ‘강론은 어떻게 할까, 무슨 말로 가족들을 위로할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도 생활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요즈음은 ‘내가 저 연세에 이르게 되고 이 지상을 떠날 채비를 갖출 상황이 되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잦아진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고 나도 내 정체성을 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병원에 도착해 어르신 모습을 보니 병자성사를 요청하던 전화와는 달리 매우 평온하게 느껴졌다. 팔순을 훨씬 넘기신 어르신의 ‘이제는 모든 것을 마음 편하게 내려놓았다’는 부드러운 자신감이랄까. 마음을 추스르고 예식을 드리고 있는데, 어르신께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병자성사 예식을 다하지 않고 곧장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산 이와 죽은 이의 예식을 같이 진행한 것이다. 급히 달려온 어르신 가족뿐만 아니라 지켜본 수녀님과도 긴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준비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준비 없이 갑자기 닥친 상황에 당황할 때가 많다. 비록 가벼운 일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은 우리에게 큰 시련을 주기도 한다. 그런 트라우마는 치유와 회복의 시간도 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도원으로 복귀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니 어르신을 향한 마음의 인사도 나온다. ‘잘 가십시오. 지상의 긴 여행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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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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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리가 휘청거린다.” 생각하였을 제 주님, 당신의 자애가 저를 받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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