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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식물인간 테리 시아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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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식물인간 상태에서 투병 중이던 테리 시아보 여사가 생명을 지탱해 주던 영영공급 튜브를 제거한 지 13일만에 숨졌다는 소식이 수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시아보의 법적 보호자인 남편은 자신의 부인이 인위적 생명연장 장치로 생명을 연장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플로리다주 법원에 영양공급 튜브 제거를 요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시아보에게서 영양공급 튜브는 제거됐다.

 시아보의 생명을 지탱해 주던 영양공급 튜브 제거에 대한 찬반 논쟁은 뜨거웠다. 미의회는 시아보에 대한 영양공급 재개 여부에 대한 판결을 연방대법원이 해야 한다는 특별법을 제정했고 시아보 부모 역시 연방대법원에 영양공급 재개를 청원했지만 미연방대법원은 부모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시아보는 결국 사망했다.

 이 사건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시아보 같이 15년간 장기간 식물인간으로 투병하고 있는 환자는 이제 더 이상 치료받을 권리가 없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시아보는 비록 장기간 식물인간 상태에서 지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몸짓 표정으로나마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고 영양공급 튜브를 제거하기 전에는 비록 의식은 없었지만 자발적으로 호흡하고 몸 안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상태는 분명히 뇌사상태는 아니었다.

 일찍이 비오 12세 교황은 비록 말기환자라 하더라도 영양공급과도 같은 통상적 치료는 항상 의무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사회적 혹은 인간적 이유들 들어 좀더 품위있는 삶 행복 등의 이유를 들어 식물인간 상태로 생명을 유지하기보다는 삶을 종료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과연 누구를 위한 주장인가? 생명을 질적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라 차등 판단할 수 있다는 그러한 사고는 유물론적(唯物論的) 혹은 안락사적 사고나 다름없다.

 테리 시아보 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안락사 허용에 관한 논의가 재개되는 것을 경계한다. 환자는 당연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고 주위로부터 간호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료인 역시 의도한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없더라도 결코 치료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비록 식물인간 상태 환자라도 영양공급과도 같은 통상적 치료나 간호는 계속돼야 하며 우리는 그 회복 가능성에 대해서도 반드시 비관적이라고 속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말기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 문제는 환자 가족들 혹은 의료인에게 맡겨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치료를 거부하는 주체는 환자 자신이 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말기 환자라 하더라도 영양공급과도 같은 기본적 치료는 거부할 수 없다. 모든 치료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료를 받은 후에 이제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료적 판단이 있을 때에 환자 자신이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심폐소생술 같은 예외적 치료 방법으로서의 연명치료를 양심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가톨릭 윤리의 판단이다. 곧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가 의료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 생명을 사회-경제적 상황 논리에 편승하여 판단할 때 우리 사회는 이제 더 이상 보호해야 할 가치는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테리 시아보 부모는 비록 자기 딸이 15년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투병했지만 살아있어 늘 볼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행복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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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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