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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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어디쯤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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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면 어느 줄에 서야 출세하고 자기 밥그릇을 크게 할 수 있느냐는 것 등을 놓고 저울질하는 후보자들이 적지않다. 또 모임이나 단체에서는 간부들의 눈에 들고자 눈도장을 찍으려고 눈앞에 알짱거리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일단 눈도장을 받으면 돋보이고 드러나며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것처럼 칭찬받고 우쭐대며 꼴사나운 작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주위 동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뜻만이 다 옳다는 식으로 동료를 지배하고 간섭해 가슴아픈 상처를 입힌다. 반면에 조용히 주어진 일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은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기는커녕 때로는 왕따(?)까지 당하면서 소외되기가 일쑤다.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갖고 태어난다. 이 개성은 인격 형성 교육을 통해 바뀌게 되는데 이렇게 후천적 교육을 통해 좋은 품성을 형성할 때에 그런 사람을 인격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인격 형성 교육을 통해 올바르게 성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 버릇 개 주나 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직자 수도자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있을까. 자기 버릇대로 자기 성질대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 사제 수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은 오늘의 나는 어떠한가. 나는 과연 어디쯤 가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성숙했고 얼마나 인격적으로 변화했는가. 십자가가 나에게는 어리석음이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고 고백한다면 또 나의 삶이 틀에 박힌 끌려가는 생활이었다고 고백한다면 너무 가혹한 말일까!
 그 동안 내 사제 생활을 돌이켜보면 생각과 말과 행위로 참으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루가복음 15장의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비유 에서 위로와 위안을 얻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이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15 21)하고 고백하면서 더 말씀을 드리려 했으나 아버지는 그 뒷말을 가로막고는 더는 잘못을 묻지 않고 아들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 하며 흥겨운 잔치를 열고 기뻐했다.

 그 말씀에 힘입어 사제 수품 25주년을 맞아 나는 이렇게 주님께 고백한다.
  주님! 흠이 적은 자녀로 새로 나겠습니다. 세상을 밝게 보겠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맞이하겠습니다. 긍정적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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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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