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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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천호성지를 피해 간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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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추워!’ 세상이 그리도 싫었던지 양부모가 아직 두 눈 뻔히 뜨고 있건만 저 세상 사람이 돼버린 불효자식! 촌놈이 그 어렵다는 서울의 명문 S대학에 합격해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자식이 추워 죽겠다며 꿈에 나타나자 아버지는 온통 거기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한식날. 아버지는 정성껏 옷 한 벌 지어 들고 평소와 같이 자식의 묘를 찾았다. 무덤을 한바퀴 휘돌아 와 그 옷에 불을 당겼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느닷없이 불어온 봄바람이 그 옷을 가로채더니 산 속 가랑잎 속에 쳐 넣는 것이 아닌가! 미쳐 손쓸 겨를도 없이 불붙은 옷은 봄 날 도깨비가 되어 이 산 저 산을 사르기 시작했다.

그 날-2002년 4월 5일-그 산불은 그렇게 났다. 돌아가신 선배 신부님을 땅에 묻고 왠지 불안한 마음으로 성지로 돌아오는데 십리나 떨어진 곳에 웬 차들이 수 십대 몰려있고 수백이나 되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산불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기 집만 안타면 불구경만큼 신나는 일 또한 없는지라 나 역시 한참을 신나게(?)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와 책상에 앉아 내 할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온 골짜기를 메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내 집이 탄다는 생각이 들자 겁이 더럭 나기 시작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휘소에 내려가 대책을 물으니 그들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바람이 워낙 쌔서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어요.” 딩동댕! 전화 벨이 울렸다. “신부님! 큰 일 났어요. 성지에 불이 붙었어요!” “빨리 성당 비품과 중요서류를 빼내고 사제관 집 밖으로 내놔!”

부랴부랴 성지로 돌아오니 이미 불은 성인들의 묘역이 있는 산등성이까지 번져 밀려오고 있었다. 이제 바람 한 번만 더 타면 네 분 성인의 묘와 열 한 분의 순교자들의 묘는 까맣게 타버릴 것이다.
‘뭔가를 해야 한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꺼야 한다. 저 산불을 꺼야 한다. 끄다가 죽더라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장식품처럼 들고 서 있는 군청 여직원의 갈퀴를 넘겨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불이 내려오는 곳을 향해…. 그러자 곁에 있던 교우들과 이상용 신부님 공무원들이 같이 따라 나섰다.

그리고 기적도 같이 일어났다. 내내 성지쪽을 향해 불던 바람이 서 쪽 산 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려오는 불길을 차단하는 방화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불은 꺼졌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을 내려오니 산밑에서 애타게 기도하시던 신부님과 수녀님 신자 분들이 개선장군 대하듯 환영해 주셨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깐이었다. 산불이 다시 일어 새 불길이 치솟더니 산은 다시 벌겋게 변하고 있었다.

그 불을 그냥 두면 이제까지의 모든 고생은 허사가 되고 만다. 위험하다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무원들을 설득해 다시 산을 올랐다.

새로 생긴 불길인지라 그 연기에 숨이 턱턱 막히고 얼굴은 확확 달아올랐다. 겨우 불길을 잡고 내려와 한 숨 돌리고 있는데! 아이고 하느님!’ 바람을 타고 넘어간 불이 그 산너머를 다 태우고 다시 산을 넘어 천호산 정상으로부터 파도처럼 아니 붉은 악마들의 군대가 총 공격을 감행하듯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끝장이다. 이젠 어쩔 수가 없어. 철수하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 모두들 입만 쩍 벌리고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우두둑 우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내 님이 오시는 소리! 승전의 소식을 안고 달려오는 말 발굽소리…! 구원의 기쁜 소식! 비! 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님이 오신 것이다.
나는 막 울었다. 그 님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그 비를 흠뻑 맞았다. 한 방울의 비도 닦아 내지 않았다. 한 참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이 때 내 귀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여기가 진짜 성지는 성진개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천둥 번개가 치고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자 한 백부장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저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그 때 그 백부장처럼 한 중년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묘한 산불은 성인들의 묘역 앞에 이르러 이렇게 묘하게 꺼졌다.
이 일이 일어 난지 어언 반 년이 지났다. 이제 시커멓게 변해버린 산과 바로 그 곁에 서 있는 파란 소나무 숲속의 하얀 십자가는 이렇게 증언한다.
“보라! 바람과 불 그리고 비를 다스리시는 신 계절의 변화 성공과 실패를 주관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신! 그 분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전지전능하시고 항상 살아계시는 우리 하느님 말고 그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오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게 묻는다. “신부님! 참 큰일 날 뻔 했네요. 그런데 그 불을 어떻게 끄셨어요?” “예! 그 불요! 하느님이 끄셨어요!”
전북 완주군 천호 성지 천호 피정의 집 관장 권이복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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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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