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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를 찾아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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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언제나 조선교구를 위해 기도하며 일과를 시작해온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날도 기도 끝에 편지를 써나갔다.
  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오는 겨울에 여러분들의 문을 두드리고 수천 명이나 되는 교우 중에 하늘이 자비를 베풀어 자신들에게 보내주신 주교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 교우가 적어도 한 명쯤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 합니다.

 얼마 안 돼 주교는 조선 밀사들이 전해 온 편지 두 통을 다시 받게 된다. 1835년 연말에 주교님을 조선에 맞이해 들이겠다 는 것이다. 저 언약된 땅 자신의 양떼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들어갈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으므로 모두가 말렸지만 목자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주교 일행은 척박한 산을 넘고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시내를 건너 다시 여러 날을 여행했다. 일차 목적은 모방 신부가 말해준 마가자(뺄리구) 교우촌으로 가서 다시 한번 조선 밀사들과 상봉 날짜와 신호를 약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언약된 땅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고뇌와 고통의 급류 가 기다리며 흐르고 있었다.
 서만자에 홀로 남게 된 모방 신부는 주님 보살핌으로 교구장이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면서 주교의 입국 소식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11월1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출발한 지 2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주교와 함께 길을 나섰던 중국인 안내자들이 뜻하지 않게 돌아왔다. 불길한 예감. 그리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마가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마가자에 도착한 다음날인 10월20일 저녁을 드신 후 갑자기 선종하셨다 고 한다. 쇠약한 몸으로 여러 날 여행한 탓이리라. 돌아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성인 신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찌 그 크신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의(聖意)가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주님 섭리는 주교의 희원(希願)이 거기에서 끝나도록 예정돼 있었다. 과연 여기에 어떤 설명 무슨 해석이 더 필요할 것인가? 눈물을 감추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적봉에서 희망적 소식을 접한 일행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동산이라는 마을 그리고 그곳에 있다는 외국인 무덤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적봉시라고는 하지만 시내에서 비포장 도로로 200여 리를 가야 한단다. 빨리 달려도 세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한다.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다운 길은 보이지 않고 와디(wadi 건조 지대의 물이 없는 강)가 도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도로 옆 메마른 골짜기마다 벌건 흙탕물이 흐르고….
 대부영자(大夫營子)라는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갈 수 없다고 말린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움푹 패인 골짜기 도로 위로는 작은 바위들이 흙탕물에 섞여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할 수 없이 지프(jee
)를 빌리기로 했다.
 집과 나무의 형상만 겨우 보이다가 이내 어둠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덜커덩거리며 얼마를 달렸을까. 마지막 산모롱이를 돌자 작은 탑 위에 붙어 있는 십자가가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인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동산 천주당.

 그 옛날 교우촌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문화혁명 때 파괴됐던 성당은 새로 세워졌고 마을 사람 모두가 교우라고 한다. 신앙은 그렇게 끈질긴 법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본당 신부님은 적봉에 가셨다 고 하면서 신학생이 손전등을 켜고 안내해 준다. 신학생이 말하는 쓰 주교 . 그래 브뤼기에르 주교를 한자 성으로 부르면 소(蘇) 주교 가 틀림없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들은 유해가 없는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를 그렇게 돌보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선종한 노사제가 일러준 대로 170년 전에 선종한 프랑스 주교 아니 초대 조선교구장을 여전히 공경해 오고 있었다.

 두고 온 차 때문에 할 수 없이 대부영자로 돌아와 하룻밤을 차 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끼니도 거르고 세수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게 대수인가.
 7월 7일. 너무 추워서 거의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한 채 다시 동산으로 향했다. 적봉에서 연락을 받고 돌아온 본당의 무(武) 신부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에 참배하고 천주당 안에서 기도를 드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동산 앞길에는 우리네 옛 5일장처럼 장이 길게 섰고 언제 비가 왔었는지 모를 정도로 날씨는 청명했다.

 마을 이름이 동산으로 바뀌기 전에는 마찌아즈 (馬架子)라고 불렀단다. 지금의 행정 구역은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 송산구 동산향. 이곳 신자수는 약 3000명. 복음이 전파된 지는 300년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단다. 그러면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록한 뺄리구 라는 마을은 어느 곳인지?
  뺄리구는 정확히 발음하면 비에롱꼬우(別龍溝 bie-long-gou)입니다. 예전에는 이 지역을 동(東)비에롱꼬우와 시(西)비에롱꼬우로 나눠 불렀는데 지금의 동산 즉 마찌아즈는 시비에롱꼬우 마을입니다.

 동산ㆍ마가자ㆍ비에롱꼬우가 모두 같은 마을인 것이다. 적봉의 주문어(朱問漁) 주교가 알고 있는 바로는 동산의 묘역 뒤에서 첫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바로 소 주교 무덤 자리라고 한다. 동산의 노인 신자들도 모두 그렇게 증언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동산의 서(徐) 신부님이 살아 계실 때 주교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록 그분 유해는 없지만 매년 무덤에 가토를 하고 경의를 표해 왔지요.

 우리의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발길을 멈춰야만 했던 교우촌. 모방 성인 신부가 조선 입국로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던 마을. 최양업ㆍ김대건 신학생도 이곳을 거쳐 마카오로 가지 않았을까?
 아! 마침내 브뤼기에르 주교의 본래 무덤 자리를 찾은 것이다.
 주님께 감사. 동산 교우촌과 그처럼 오랫동안 신앙을 지켜온 교우들 힘든 여정을 함께 했던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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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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