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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르 찾아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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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목자 없는 교회가 된 조선 포교지. 그러나 이 슬픈 교회의 양떼들은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성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조신철(가롤로) 현석문(가롤로) 등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1824년 말에 다시 교황에게 편지를 써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 저 위험한 포교지에 들어가는 사명을 맡길 것인가. 예수회에서는 선교사 부족을 이유로 이를 마다했다. 파리외방전교회도 선교사 부족과 기금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샴(지금의 태국) 교구에서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런 소식에 기가 막혔다.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우리의 도움 없이는 불우한 삶마저 지탱해 나갈 수 없는 조선의 양떼들을 돕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까지도 나눠줘야 하는 것이 애덕의 가르침아니던가.
  예전에 중국인 사제 한 분(주문모 야고보 신부)이 조선에 들어가 박해 가운데서도 성무를 집행하다가 영광스러운 순교를 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그분처럼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사람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주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라면 이런 저런 이유와 위험 때문에 포교지로 갈 수 있는 해적선을 해적선이라고 마다했겠습니까?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침내 결심했다.
  과연 어느 사제가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해외선교를 결심한 선교사로서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참된 목자의 자세를 내비친 것이다. 실제로 여기에는 조선 선교가 곧 순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의 자세가 요구되고 있었다. 뿐더러 다른 이유를 들어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처럼 대단한 용덕이 필요했다.
 결심을 굳힌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미 그 이전에 샴 교구 부주교(부교구장) 서임을 수락하고 성성식을 가졌으니 그때가 1829년 6월29일이었다.    포교성성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용단에 큰 힘을 얻었다. 여기에 더해 조선 포교지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할 것인가를 고심하던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1831년 2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선출됐다. 모든 것이 순서에 따라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새 교황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1831년 9월9일. 조선 포교지를 독립된 교구로 선포하는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에 임명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미 방콕을 떠나 페낭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중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32년 7월25일 교구장 임명 소식을 접하고는 즉시 조선으로 첫번째 사목서한(윤 9월26일자)을 보낸 뒤 채비를 꾸렸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복음 선포를 위해 노력하다가 선종했던 길을 따라 가려는 것이다. 실로 수많은 고통과 좌절 그리고 기쁨과 희망으로 점철돼 있는 길이었다.

 그해 10월18일.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선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조선과 가까운 곳으로…. 열병으로 인한 고통은 여행 내내 그를 괴롭혔다. 참기 어려울 만큼 심한 두통. 아무리 좋은 음식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위경련. 북으로 갈수록 혹독해지는 겨울 추위는 발걸음을 더디게는 했지만 결코 그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1년 여정 끝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산시) 교구장이 있는 대동(大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주교는 조선 밀사들이 보낸 편지를 처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기쁨과 희망과 아쉬움. 그래서 조선과 더 가까운 장소를 택해 간 곳이 500여 리 떨어진 하북(허베이)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도착한 것은 1834년 10월8일. 그곳에서는 조선 입국로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가 병약해진 주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북성 서만자(시완쯔)는 몽골어로 시방(Sivang)이라 불리던 마을. 예수회 선교사들이 첫 복음의 터전을 닦고 이어 라자로회 프랑스 선교사들이 북방전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하북성 장가구시 숭례구 서만자진. 북경에서 북쪽으로 몇 시간을 달려 장가구시까지 간 뒤 만리장성을 넘어 한 시간쯤을 더 가야 한다. 물론 자동차로.
 서만자교구에는 현재 22개 천주당에 약 8000명의 신자가 있고 서만자진에만 3개 천주당에 약 3000명 정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서만자 천주당이 바로 주교좌 성당. 오랜 세월 공산 치하와 문화혁명으로 갖은 고난을 겪은 요량(姚良 레오) 주교가 성당 뒤편의 작은 주교관에서 일행을 맞이했다. 지금 천주당은 문화혁명 이후 새로 건립한 것이지만 아직도 산비탈을 깎아 만든 토굴집 등 옛 신자들의 생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이다.
 1834년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건립한 성당이 있었고 성당 한편에는 작은 신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척박한 곳이었다. 사방에 둘러싸인 산들은 나무가 살 수 없는 탓에 헐벗은 상태였고 물은 언제나 부족했다.

 그래도 대부분이 신자인 이곳 사람들은 너무나 좋았다. 그들은 목자를 사랑 하고 목자 보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들 속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천주교를 증오하는 박해자들이 그 평온을 그대로 둘 리 있겠는가.
 어느 날 브뤼기에르 주교는 신자들에 이끌려 부랴부랴 산 위 토굴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박해 위험이 닥친 것이다. 그분의 말을 빌면 이 토굴집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산비탈에 사람의 손으로 파서 만든 집 이었다. 피신할 때마다 신자들은 언제나 서양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만한 물건과 모든 성물을 피신처로 옮기곤 했다.
 피신은 자주 반복됐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사업에 협력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여름 복사 왕(王) 요셉을 통해 조선 교회의 밀사들이 보낸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의 편지가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아직 주교를 모셔들일 만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해 초에 받은 편지 내용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그러나 주교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라면 이 정도 난관에서 그대로 멈추고 말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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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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