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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르 찾아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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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개포동본당(주임 염수의 신부)은 오는 8월27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소 바르톨로메오 1792~1835) 주교 무덤이 있는 내몽골 마가자를 순례 소 주교 묘비와 현양비를 세우고 돌아온다. 이에 앞서 지난해 소 주교 무덤을 직접 탐사했던 차기진(루가) 양업교회사연구소장의 마가자 탐사기를 3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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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5년 10월20일. 정확히 170년 전이다.
 자신의 양떼가 기다리는 조선 포교지를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목자. 우리의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소 바르톨로메오 1792~1835년) 주교는 사랑하는 포교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내몽골의 한 촌락에서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셋이었다.
 내몽골 땅의 마가자(馬架子). 몽골어로 뺄리구(Pie-li-keou)라고 하는 어느 교우촌. 그곳에서 800여 리 떨어진 서만자(西灣子) 신학교에서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들은 조선 선교사 모방(나 베드로) 신부는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안고 혈혈단신 머나먼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분 시신을 교우촌 뒷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했다. 무덤 앞에는 마가자 지역에서 나는 돌로 묘비가 세워졌고 거기에는 소 주교의 묘 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졌다.
 이어 모방 신부는 길을 재촉해 조선과 중국 국경에서 조선교회 밀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1836년 1월13일(음력 1835년 11월25일) 마침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자신의 양떼가 기다리던 땅에 친구(親口)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바로 그 땅이었다.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걸어온 애달픈 선교 역사는 오랫동안 우리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교회 한쪽에서 그분의 선교 행로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1931년.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해 기념 행사를 계획하게 된다. 그러면서 누군가에 의해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몽골 땅의 브뤼기에르 주교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교구 안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만이라도 모셔와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데다가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으므로 그곳에 가서 무덤을 찾고 유해를 모셔오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조선교구에서는 심양(당시의 이름은 봉천) 교구에 부탁해 보기로 했다.
 심양교구장 위(衛) 주교는 수소문 끝에 마가자라고 불리는 부락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 유해를 발굴해 심양 주교관에 모셔두고는 조선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조선에서는 즉시 포아요(표 가스통) 신부를 심양으로 보냈고 주교 유해는 1931년 9월24일 마침내 조선으로 옮겨졌다. 생전에 밟아야만 했을 그 땅이었다.
 그해 10월15일. 명동대성당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 장례미사가 성대하게 봉헌됐다. 그분이 선종한 지 한 세기가 흐른 뒤였다. 미사 후에는 용산 삼호정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고 지금도 그분 무덤은 이 묘역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 땅의 복음화를 기원하면서.
 이후 우리는 또 다시 그 선교 역사를 잊고 살아왔다. 그분이 양떼를 찾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밟은 땅 마가자. 그분의 진토가 남아 있는 마가자의 무덤은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미 여러 해 전에 선종한 어느 사제는 생전에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저 중국 땅 어딘가에 있을 주교님 무덤자리를 찾아 현양비라도 그 앞에 세워드려야만 한다. 이는 중국교회나 프랑스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우리 초대 교구장이므로 한국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지난해 7월5일. 마가자(뺄리구)에 있을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해 심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손에 쥔 자료라고는 그 옛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그린 만주 선교 지도 한 장. 지도에는 그들의 선교 구역 밖에 있는 두 강줄기(랴오허강 상류) 사이에 점이 하나 찍혀 있고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이 쓰여 있었다.
 ㆍ흑수(검은 강) ㆍ뺄리구(Pie-lie-keou) ㆍ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1835)
 정확히 북위 42.3°/ 동경 117.5° 지점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선교 구역 밖이었음이 분명하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선교를 담당한 지역이었으니까.
 요즈음에 발간된 중국 지도를 펴보니 북위 42.1°/ 동경 119.5° 지점에 요녕성의 흑수(黑水)ㆍ마가자(馬架子)라는 지명이 보인다. 바로 이곳이다. 아! 그러나 경도가 2°정도 차이가 나지 않는가. 실제로 둘 사이의 거리는 300리(120km)가 넘는다. 그러면 이 흑수ㆍ마가자는 뺄리구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용산의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석에도 요녕성이 아니라 몽골(Mongolia)에서 선종 이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그러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본래 무덤 자리였던 몽골의 뺄리구 마가자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심양 교구청에 도착했으나 워낙 오래된 일인지라 기억하는 이가 하나도 없단다. 선교 지도를 보니 그곳과 가까운 적봉교구(赤峰敎區)에서는 혹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는 말을 덧붙인다. 다시 지도를 보니 1000리(400km) 가까이 되는 아주 먼 곳이다.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다시 적봉으로 향했다. 도중에 1박을 하고 적봉에 도착한 것이 7월6일.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러나 이곳에는 기대가 희망으로 바뀌는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산(東山). 즉 적봉시 송산구 동산이라는 마을에 아주 오래된 천주당이 있고 또 그곳에 오래된 외국인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 감사.
 과연 그들이 말하는 동산이라는 곳이 우리가 찾아가는 마가자일까.



**브뤼기에르 주교 연보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부 나르본의 레싹에서 출생
1815년 12월 23일 사제 수품 1815~1825년 대신학교 교수 및 본당 사목 1825년 9월 17일 파리 외방전교회 입회 1826년 2월 5일 샴(현 태국)의 선교사로 임명돼 프랑스 출발 1829년 5월 19일 조선 사목을 자임하는 동시에 전교회에 그 사목을 수락하도록 요청 1829년 6월 29일 주교 성성식(방콕)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 설정 및 초대 교구장 서임 1829~1832년 페낭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동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 도착 1833년 10월 10일 산서(산시)교구 도착 1834년 10월 8일 하북(허베이)의 서만자(시방) 교우촌 도착 1835년 10월 19일 마가자(뺄리구) 교우촌 도착 1835년 10월 20일 선종(43세)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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