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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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부활신앙이 김대건 성인 순교 영성 핵심

최석우 몬시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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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의 순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증거하신 부활 신앙에 기초해 있다.
사진은 지난 199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개최한 성 김대건 기념 전시회장.
 
▲ 1925년 7월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 주례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이날 시복식에는 추기경 다섯 명과 상당수의 주교들이 참례했다.
한국 교회 대표로는 뮈텔ㆍ드망즈 주교와 한기근ㆍ기낭 신부 등 성직자들과 장면 박사를 비롯한 15명의 평신도들이 참례했다.
사진은 한국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장면
 
▲ 순교의 개념

 교회는 순교자로 인정받기 위한 순교 원인으로 `죽음`과 `신앙` 두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죽음은 순교의 질료인(質料因)으로서, 순교자측에선 잔인한 죽임을 당한 사실이, 박해자측에선 가혹하게 죽인 사실이 인정돼야 한다.

 신앙은 순교의 형상인(形相因)으로서, 순교자 측에선 신앙을 위해 죽은 사실이, 박해자 측에선 신앙이 미워서 죽인 사실이 인정돼야 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죽음은 수동적 물체에 지나지 않으므로 능동적이고 정신적인 신앙과 결합될 때에만 순교라는 실체가 구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순교의 근본 이유이다. 그런데 옥사자(獄死者)나 유배자일 경우, 그 죽음이 과연 고문의 결과에서 온 것인지 또는 북한에서처럼 공산당이 천주교 신자를 오로지 스파이라는 정치적 이유에서 죽였을 경우에 그래도 그것을 신앙을 위한 또는 신앙의 증오로 볼 수 있는 것인지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럴 때 최종 판결은 교황청에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순교 여부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유권자는 교황청 시성성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연구를 통해 순교자 여부를 밝혀낼 수는 있다. 그러나 마치 재판관처럼 순교자 여부의 판결을 내려선 안 된다. 순교자 수를 가감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로마가 말했다. 사건은 끝났다" (Roma locuta, causa finita)고 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유명한 말은 오늘도 변함 없는 진리로 통한다.

▲ 김대건 신부는 국사범

 김대건 신부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신앙의 증오에서 사형되지 않았고 놀랍게도 나라를 배반한 국사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그의 사형 판결문을 다시 읽어 보기로 하자.

 병오(1846)년 7월25일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권돈인은 "사학에 물든 죄와 나라의 법률을 배반한 죄는, 실로 일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연석에 오른 대신과 여러 재상들의 논의가 모두 다른 말이 없으니 포도청에 갇혀있는 김대건을 군문에 내보내 효수경중하기를 청합니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라고 했다.

 권돈인이 말한 나라의 법률을 배반한 죄, 즉 `반국지율`은 나라을 떠나 국경을 넘어 이국땅에 가는 것을 금하는 엄정한 국법을 어긴 것이다. 실정법을 어긴 것이므로 그것은 용서 받지 못할 일이고, 국법을 어겼으니 나라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사범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대건과 최양업 등 세 소년은 1836년 말 마카오 신학교에 가기 위해 `월경죄`(越境罪)를 무릅쓰고 조선을 떠났다. 이러한 사실은 미구에 문초에서 드러났고 김 신부는 실정법을 어긴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이 종교 때문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렇지만 천주교의 적들은 나라를 배반한 죄를 구실로 해 오히려 그것을 `대역죄인`으로 더 무거운 죄를 씌워 김 신부를 `효수경중`이라는 최고의 국형으로 처리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형 선고문은 개정되지 않은 채 사형직전에 그대로 낭독됐다. 그래서 김 신부는 다시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1920년대에 와서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 시복 조사 재판에서 검사의 이의 제기와 변호사의 답변

 잔인한 죽음에 대해 검사는 목격증인들의 증언으로 만족하고 의심이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김 신부의 죽음이 신앙을 위한 죽음이었는가에 대해서도 김 신부 자신이 종교 때문이었다고 변호한 것처럼 증인들도 한결같이 교회용무, 교회사정, 선교사들 이익 등을 들어 그 일에 종사하다가 붙잡혀 순교한 것으로 증언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순교의 근본 이유인 박해자의 신앙 증오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검사는 김 신부에게 어떠한 형벌도 가해지지 않았고, 감옥에서도 아무런 큰 괴롭힘을 받지 않았으며 포장은 그에게 구명까지 약속했고 고관들도 김 신부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러므로 죽음의 이유를 신앙의 증오에만 돌릴 수는 없고 오히려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조선땅을 포기함으로써 김 신부가 범한 월경죄를 이유로 특수 정치범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변호사는 박해자 측의 순교의 근본 이유인 신앙 증오가 사형 결정의 유일의, 아니면 적어도 주요 이유였음을 명료한 논증으로 입증하지 않고서는 김 신부 순교 이유에 대해 완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앙 증오는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는 있었다. 왜냐하면 순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되는 바, 예컨대 만약 폭군이 신앙의 증오심에 선동돼 사형을 집행했다면 순교는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으로 그의 답변을 끝냈다.  
 
▲ 새남터 형장으로

 최 베드로 증인은 순교를 목격하고 신부의 머리가 도끼에 잘려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와서 전한 여러 교우들로부터 들었다고 하며 김 신부가 새남터 형장에 이르는 광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새남터 형지로 가는 동안 그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가 이제 죽음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는지 좀 슬픈



가톨릭평화신문  200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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