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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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교계제도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조광 교수

“지역교회 쇄신·발전의 진정한 전환점”/ ‘선교지’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가받아/ ‘교회 성숙’ 의미에 대해 신학적으로 다시 검토할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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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 교수
 

한국교회는 분명 서유럽의 교회와는 달리 그 신앙실천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짧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아직도 문화의 복음화 내지 가톨릭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 17세기 이후 그리스도교는 곧 서양의 문화였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은 서양의 문화를 인정하고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항해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이를 무시했던 과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보편교회는 복음과 문화의 분리라는 일대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래서 복음은 문화가 아니라 문화를 초월하는 요소이고, 모든 문화의 통로를 따라서 각 민족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와 같은 성숙한 사고방식은 이른바 선교지의 교회에 대단한 지적 충격을 주게 된 일대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 인식은 선교신학의 방향을 전환시켰고, 그리스도교 복음선포의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복음과 문화의 분리작업은 축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즉 20세기 초반 베네딕토 15세 교황 때 교황청에서는 가톨릭교회의 현지화정책에 본격적 시동을 건 바 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신앙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현지문화를 존중하고 현지인 성직자의 양성에 좀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역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찌 보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서양인 신자들과 대등한 가톨릭 신앙을 선교지역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음을 뜻한다.

신앙의 토착화는 필연적으로 인적(人的) 토착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26년에는 중국인 주교가 6명이 탄생하여 교구장을 맞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1927년에 일본인이 주교로 비로소 서품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현지인 수도회의 인가도 동양의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토착화를 위한 노력은 비오 12세 교황과 요한 23세 교황 때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어 갔다. 이는 선교신학의 발전이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음과 동시에 그 선교신학이 발전된 결과이기도 했다.

교계제도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요청되는 성사(聖事) 집전에 관한 권한임과 동시에, 교회 내의 입법·사법·행정 업무에 관한 재치권(裁治權)의 행사와 관련된 제도이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는 교계제도를 통해서 세계교회를 관장해 왔다. 예를 들면, 교황청은 유럽 여러 나라에 지역교회의 주교들을 임명해서 복음의 실천을 다져 나갔다. 그리고 이에 관한 일들을 관장하기 위해서 주교성성(主敎聖省)이란 부서를 교황청에 두었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대항해시대 이래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서 신세계와 동양사회로 진출해 나갔다. 그리고 이 선교지의 경우는 충분한 성장이 이룩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역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치권의 일부를 제한시켰다. 이 선교지의 교회를 관장하고 선교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서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새롭게 설정되었다. 선교지의 교회는 그 재치권의 행사에 있어서 교황청 포교성에 직속되어 지도와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교황청은 선교지의 교회가 자립능력을 갖추게 되면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해서 완전한 재치권을 인정했다.

이 측면에서 볼 때, 정식 교계제도의 설정은 교회 제도적 측면에서 일대 발전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한국교회에 정식 교계제도의 설정은 한국교회가 탄생된 이후 178년 만에 성취된 일이었다. 그리고 ‘조선대목구’가 처음으로 탄생한 1831년 이후 131년이 지나서 한국교회는 정식 교구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일은 주변에 비해서 결코 빠른 편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일본교회는 1891년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에도 1946년에 정식 교계제도가 성립된 바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계제도의 설정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능력을 교황청에서 뒤늦게 확인한 결과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선교지 교회의 미숙한 단계를 청산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숙한 일원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주교들은 교계제도의 설정을 통해서 공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진 교부로서 1962년도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교계제도의 설정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인적 토착화의 단계를 지나서 제도적 토착화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문화적 토착화를 향해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계제도의 설정은 한국교회의 쇄신에 박차를 가해주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다. 어찌 보면 오늘과 내일의 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진정한 전환점은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에서 구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인류복음화성에 소속되어 있다. 이는 한국교회가 아직도 미성숙한 교회로 인정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의 성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학적으로 다시 검토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50주년은 한국교회의 주교단과 교황청의 전문가들에게 한국교회가 교황청의 주교성이 아닌 인류복음화성에 소속되어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 대해서 본격적 재검토를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 1962년 6월 한국교회 교계제도 설정식에서 대주교의 상징 팔리움을 받은 서울 노기남 대주교(가운데), 대구 서정길 대주교(오른쪽), 광주 현 대주교.
 

 


가톨릭신문  20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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