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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자 발견 150주년](하) 조선인 포로 10만 중 1만 명 신앙의 가시관을 쓰다

일본 교회 내 조선인 포로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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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회 내 조선인 포로 신자들

▲ 왜란으로 잡혀온 조선인 신자 중에 순교한 이들도 적지 않다. 호오코 바루 순교지 복자 205위 현양비와 그 앞에 놓인 조선 출신 순교 복자 13위 현양비. 백슬기 기자

“올해 조선에서 끌려와 나가사키에서 머물고 있는 포로 여럿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이들 1300명 중 대다수는 2년 전에 세례를 받았고 올해는 고해성사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간미 있고 친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루이스 프로이스 신부 1596년 12월 13일 일본 나가사키 연보 중에서).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인 프로이스 신부가 소개한 조선인들은 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으로 끌려온 포로였다. 10만 명에 가까운 조선인 포로 중 세례성사를 받고 입교한 신자는 1만 명에 가까웠다. 조선인 신자들은 일본 현지에서 순교하거나 수도자가 되기도 하고 선교사들과 함께 해외로 추방되기도 했다. 이들 중 첫 조선인 순교자 요아킴 하치칸(?~1613)과 일본 미야코의 박 마리나(1573~1636) 수녀 조선인 첫 예수회 수사 복자 가이오 지에몬(1571~1624)의 삶을 ‘천국에서 보낸 편지’ 형식으로 전한다.

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요아킴 하치칸(첫 조선인 순교자)

“비록 왜란 중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신앙을 알고 참 행복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에도 키리시탄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프란치스코회 소테로 신부님을 알게 됐습니다. 신부님께 집 방 한 칸을 임시 성당으로 내드리고 숙박도 도와드렸죠. 키리시탄들을 대하는 분위기가 좋지 않아 모든 것을 비밀스럽게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성스런 예식에 목말라 사제를 찾는 신자들이 많아져 결국 1613년 여름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처형되던 날 그 자리엔 ‘신자들의 우두머리를 사형에 처한다’는 선고문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날이 목을 스치우는 순간에 기쁨에 가득 차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그렇게 저는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광을 얻게 됐습니다.”

박 마리나 수녀(조선인 수도자)

“저도 왜란 때 끌려왔으나 다행히 선한 주인을 만나 절의 비구니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함께 비구니로 지내던 나이토 줄리아가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며 교리를 전해줬습니다. 그때 저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느꼈고 천주교로 개종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1614년 전국에 불어닥친 금교령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포졸들이 수녀원으로 들이닥쳤고 저와 다른 수녀들을 엄동설한에 자루에 넣어 매달아 두었습니다. 배교도 하지 않고 목숨줄도 끊어지지 않으니 막부는 저를 바다 건너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해버렸지요. 그곳에서 저는 앞이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럽기보다 오히려 천국과 영원의 세계를 관상할 수 있게 허락해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1636년 5월 병으로 지쳐 있던 저는 마중 나온 수녀회 창립자 줄리아를 따라 천국으로 왔습니다.”

복자 가이오 지에몬(조선인 첫 예수회 수사)

“저도 주인의 도움으로 불승이 됐지만 곧 세례를 받고 전도사로 봉사했습니다. 또 수녀님과 같은 해에 마닐라로 추방됐었죠. 하지만 이듬해 다시 나가사키로 들어와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의 잠복 생활을 도왔습니다. 1622년 투옥된 도미니코회의 베드로 바스케스 신부님을 뵙기 위해 감옥을 찾아갔다가 함께 옥에 갇혔습니다. 투옥은 순교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징조라고 생각돼 오히려 기뻐 가슴이 뛰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1년 동안 단식과 기도 고행으로 순교를 맞이할 깨끗한 몸과 마음을 준비했죠. 그리고 1624년 11월 장작더미가 깔린 십자가 위에 묶였습니다. 장작더미에서 시작된 불길은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껴안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조선인 신자들이 지은 성 라우렌시오 성당

▲ 조선인 신자들이 힘을 모아 ‘성 라우렌시오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성당 자리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려교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백슬기 기자

4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일본 땅에 봉헌한 성당이 있다. 바로 1610년 나가사키에 지어진 ‘성 라우렌시오 성당’이다.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중 세례를 받은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모여 살던 나가사키 변두리에 성당을 짓고 순교 성인 라우렌시오에게 봉헌했다. 조선인 공동체도 순교를 각오한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1620년 2월 변두리 지역까지 박해가 몰아치면서 성당은 파괴됐다.

지금도 후루카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는 길에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 ‘高麗橋’(고려교)라는 다리가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고려인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아직 성 라우렌시오 성당의 정확한 자리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역사학자는 고려교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가 천주교 탄압과 순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만큼 서로의 역사에 공감하며 더욱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길 바랍니다.”

4일 26위 성인 박물관에서 만난 미야자키 요시노부(나가사키대교구 사무처장 비서)씨는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가 긴밀하게 연관돼 있음을 설명하며 앞으로 양국 교회가 친밀한 이웃이 되길 소망했다.

미야자키씨는 특히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서한에 일본 교회를 언급하면서 ‘옛날 열심히 한 신자들의 후손 중 몇 명이라도…숨어서 흠숭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기록한 사실에 집중하면서 일본 신자 발견 사건(1865)보다 30여 년 앞서 잠복 키리시탄의 존재를 예견했다고 감탄했다.

“비록 앵베르 주교가 이듬해 기해박해 때 순교하면서 특별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일본 신자들에 대해 관심을 두고 찾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일본 신자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씨는 “과거 전쟁을 일으킨 것과 식민 지배에 대해 최근 일본 주교단이 반성을 거듭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며 “한일 양국 교회가 과거사에 대해 사과와 이해를 통해 서로 협력하고 발전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본 나가사키=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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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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