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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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9) 죽음과 종말에 관한 묵상 ① :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근거

‘하느님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근거
구원 역사 볼 때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 가져다 줘
부족한 인생마저도 마침내 감싸안으시는 하느님
‘용서’에 대한 의탁·감사야말로 종말론적 염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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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어리석게 살아온 생애를 감싸안아주시는 절대자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향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사진은 2007년 위령의 날을 맞아 수원교구 미리내 성직자묘지에서 사제단과 신자들이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는 모습.
 

요즘 등산 인구가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사실, 산(山)은 참 좋다. 산에 가면 일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잊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생명의 충만한 기운을 얻게 된다. 곳곳에 아름다운 들꽃들이 만발한 봄의 산이나 사방이 짙은 녹음으로 온통 푸르기만 한 여름 산, 그리고 형형색색의 단풍이 물든 가을 산과 모든 것이 하얀 눈에 뒤덮인 겨울 산 등 모두 나름대로의 묘미를 지니고 있다.

늦가을의 산

하지만 11월의 늦가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화려하게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며 빈 나뭇가지 사이로 사방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래서 단풍 구경을 나왔던 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 허전한 자취가 느껴질 때, 산은 참으로 적막하고 고요한 제 모습을 점차 드러낸다. 비어있는 그대로의 산의 모습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즈음의 산에 가면 빈 나뭇가지 사이로 먼 거리의 풍경이 아주 잘 보인다. 이때의 산은 자신의 빈 모습 안에서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줄 아는 고독과 관용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는 정녕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를 비울 때 우리가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늦가을의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벌써 11월이다. 11월은 위령성월이다. 추워진 날씨 속에 옷깃을 여미며 떨어진 낙엽을 밟고 걸어가면서, 모든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시간인 것이다. 우리에게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미리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 과연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죽음 직전의 체험

라인홀트 메스너(1944~ )는 1978년 사상 처음으로 산소호흡기 없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8,848m) 등정에 성공했으며, 이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8,000m 급의 열네 봉우리에 모두 올랐던 이탈리아 출신의 산악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죽음의 지대」(한문화, 2007)에서 등반 중의 추락 체험에 대해 어느 의사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갑자기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가? 추락 사고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클라이머들은 이구동성으로 낙하 중에 수없이 많은 영상들, 특히 그들의 ‘전(全) 생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앞을 지나갔다고 한다. 단란한 식구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며, 지난날의 중요했던 체험이 갑자기 나타나는 등 눈앞에 다가선 파국이 이상하게도 전혀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았다고 말한다.”(100~101쪽)

이러한 죽음 직전의 파노라마 현상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 자신이 살아온 생애의 중요한 나날들이 마치 영화 필름을 빨리 돌리듯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 직전에 극적으로 생환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이다. 그 기억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장 후회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 보았던 어느 영화에서, 그 주인공은 총을 맞고 죽어가는 상태에서 독백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묘사한다.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그의 눈앞을 스쳐간 것은, 어린 시절 보이스카우트 야외캠프 때 숲속 풀밭에 드러누워 바라보았던 별똥별 떨어지는 밤하늘의 광경, 즉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로 가득 찬 아름다운 우주의 풍경이었다. 또한 집앞 길가에 떨어져 바람에 휘날리던 노란 빛깔의 낙엽들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과거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지금 죽음 직전의 이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인생에 대한 감사함(gratitude)이라는 역설적 사실을….

누구든 언젠가는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왜 주인공이 죽는 순간에 자신의 생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우리에게도 동일한 체험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분명 절대자 하느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감옥에 수감된 후에 자신의 삶에 대해 너무도 큰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감옥에 갇힌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온 생애를 찬찬히 바라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에게 망각의 은혜가 주어졌기에 그냥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만일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잊지 않고 모두 생생히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두 발 뻗고 편하게 잠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죽하면 죽음 후에 마침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벌거벗은 온 생애가 만천하에 그대로 공개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형벌이자 정화 과정이라고 말하겠는가?

사랑에서 영생(永生)으로

독일의 성서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1934~ )는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성바오로, 1986)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가 한평생 쌓아올린 모든 자기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숨겨두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연기해 보이던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중지해야 한다.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마치 불과 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35쪽)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시편 저자는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130,3)라고 고백한다. 어느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서 나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고결하고 완벽한 삶을 살아왔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편 저자가 간절히 구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자비와 용서이다.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4절)

사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이들을 업신 여기는 사람의 기도보다는, 자신을 낮추어 자비를 간구하는 죄인의 기도를 더 즐겨 들으신다(루카 18,9-14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자신의 부끄러운 생애에 대해 깊이 뉘우치면서도



가톨릭신문  201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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