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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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는 성숙함 / 박유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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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담당하고 있는 신학생과 묵상 나눔을 할 때였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의 새로움을 말하는 그 친구의 눈빛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가 발견한 새로움은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을 결코 미워하지 않으셨다’였다.

짐짓 모르는 체하며 신학생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본다. 자기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비방하고 모욕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대며, 함정에 빠뜨려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친구의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모습 때문이란다.

예수님은 평소 바리사이파들의 위선에 대해 자주 지적하셨고, 그들의 논박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고수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셨다.

겉으로만 봐선 예수님과 바리사이파인 그 둘 사이에 늘 긴장관계가 팽팽한 상태였는데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도 계속해서 마주하는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에게 최소한의 감정 또는 관심이라도 있을 때 미움도 가능하다. 상대를 포기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 감정이란 것이다. 혹자는 미움도 애정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우리는 어떠한 때 미워하고 어떠한 때 무관심하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와 다름을 마주하고 부딪칠 때 생기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든 나(ego)를 주장하고 나와 같이 만들려고 하다가 도저히 힘에 부쳐 더 이상 감당 못할 때 취하는 방식이 포기와 무관심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겪고 나서 상처받고 구멍나버린 마음 한구석을 이젠 다른 사람들로 메우려 무던히 애를 쓴다. 그렇게 자기 주변에 자기를 반대하지 않고 자기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 ‘또 다른 나’들로만 채우고서 자신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너무나 많아 행복하다고 한다.

근데 이 같은 자화상이 왠지 낯설지만은 않다. 성당 다니며 단체활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지 말이다. 이 같은 행복감은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자신을, 또한 공동체를 더 좋은 모습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건강하게 이끌어 가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분명 있다.

한 사람이 안주하지 않고 성숙, 성장하기 위해선 새로운 도전은 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것은 그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는 전체주의를 지양하고 다양성 안에 조화를 지향하는 모임이다. 그러기에 나와 다름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 하느님 안에 모두가 한 백성 하나인 공동체를 이루려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나날이 돼야 한다.


박유현 신부
(수원 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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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7-0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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