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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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내 김대건 성인의 자취를 따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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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일이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신부는 교구와는 특별한 인연을 지닌다. 성인이 소년 시절을 보내며 신앙을 익히고 사제성소의 꿈을 키웠던 은이성지, 사목 활동지로 꼽히는 단내성가정성지, 묘소가 있는 미리내성지 등 여러 성지가 성인을 현양한다.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성인의 삶과 영성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자리를 함께하는 셈이다. 김대건 성인 신심미사일을 맞아 그 자취를 다시금 새겨본다.



■ 한덕골

성인이 신학생으로 선발되기까지의 과정은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821년 내포 지방 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 1790~1839)과 고 우르술라(1798~1864)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 청파로 이주했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 한덕골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해 살았다는 것이다.

한덕골은 박해시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원래 한덕골은 윗마을 광파리골과 아랫마을 한덕골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다. 그중 교우촌은 윗마을인 광파리골이다. 족보에 의하면 성인의 조부 김택현(金澤鉉, 1766-1830)과 숙부 김제철(金濟哲, 1803-1835)의 묘가 한덕골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김대건 가족이 살던 곳은 조금 떨어진 광파리골과 이웃의 성애골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최양업 신부 큰아버지 최영겸(베드로)이 이주해 살던 곳이기도 했고 최양업 신부도 1850년 초에 여기를 방문해서 막내를 만난 것으로 나타난다.

용인 땅으로 이주 후 김대건 성인의 집안 생활은 아주 어려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 김제준은 단지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성인의 가족은 처음에는 지낼 집이 없어 성애골 골짜기에 들어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칡으로 얽고 억새풀을 덮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곳 순교자로는 성인의 부친 성 김제준과 김시몬(1870년 순교), 김마리아(1866년 순교) 등이 있다.

한덕골 순교사적지는 제1대리구 천리본당(주임 서동찬 신부)이 관리하고 있으며 대형 십자가와 야외제대, 그리고 양옆으로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상이 설치돼 있다. 2010년 5월에는 파티마의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다.


■ 은이(隱里)(골배마실) 성지

모방 신부는 1836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전후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 인근 ‘은이 공소’를 방문한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 성인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은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숨은 이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성인의 가족이 살던 골배마실은 은이의 윗마을이었다. 문수봉 너머 남서쪽에는 한덕골 교우촌과 미리내 교우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은이 교우촌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설에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형성됐다고 한다.

성인은 태어날 당시에 이미 증조부인 김운조가 해미에서 옥사했고, 종조부 김종한이 대구 감영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는 등 모진 박해 속에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외에도 부친 김제준이 기해박해 때 서소문에서 참수된 것을 비롯해 그의 집안 순교자들은 모두 10명에 달한다.

그런 면에서 성인은 골배마실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가문의 천주교 신앙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에 남다른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서종태 교수(스테파노·전주대)는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에서 “그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서 자신을 ‘김해 김 안드레아’ 등 본관 ‘김해’를 특별히 밝히고 있다”며 “이는 순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이를 계승하여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밝힌다.

이처럼 골배마실은 성인의 소년 시절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서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다.

한편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은이공소다. 「용인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은이 공소는 조선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다. 성인은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은이성지는 김대건 성인이 성소의 싹을 키웠던 곳이자 그 결실이 가장 먼저 열렸던 장소라 할 것이다. 그는 1845년 사제로 서품돼 귀국한 뒤 그해 말까지 한양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교구 앵베르 주교 허락을 얻어 용인으로 내려가 모친 고 우르술라와 상봉했다. 그 다음 1846년 부활 때까지 은이 공소에 머물며 주변 교우촌을 순방했다. 은이 공소는 성인의 사목 중심지 즉 본당 역할을 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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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6-3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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